청소년들도 그림책을 읽어야 한다!!

 

그림책이란 과연 무엇일까?

요즘 들어 자꾸 되뇌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림책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출판 시장에서 그림책의 존재란 아주 미미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림책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국제적으로 그림책에 수여하는 상을 수상하는 일도 많아지고, 외국에 수출되는 그림책도 많아졌다. 한마디로 그림책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이다.
정말 반가운 일이다. 그림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좋은 우리 그림책을 만나게 되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림책을 볼 때 씁쓸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림책은 어린 아이들이나 보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림책이란 과연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자꾸 되뇌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림책’ 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책, 그림이 이야기를 전달하기 때문에 글을 잘 모르는 유아도 볼 수 있는 책, 엄마가 읽어주는 책…….
모두 맞는 말이다.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서 만들어진 책이다. 조금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야기와 이미지가 어우러져 만들어진 책이다. 그림책 가운데는 글자 없는 그림책도 있지만 글자가 없다고 해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그림 대신 사진으로 만들어진 경우도 있다.
글로 빼곡한 책은 글을 모르면 읽을 수 없지만 그림책은 이미지를 보고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에 갓난아이들도 볼 수 있다.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림을 보면 더욱 좋다.
그러니 그림책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이야기와 이미지가 어우러진 책으로 갓난아이들도 볼 수 있는 책’ 정도가 될 것이다.
참 이상한 건 ‘갓난아이도 볼 수 있는 책’이라는 말을 ‘글을 능숙하게 읽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보는 책’이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글이란 이른바 ‘배운 사람들’이나 읽을 수 있는 것이고, 그림은 누구나 볼 수 있다고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막상 글자 없는 그림책이나 아주 짧고 함축적인 글로 써진 그림책일수록 어른들이 오히려 더 어려워하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그림책을 어린아이들이 보는 책으로만 여기는 또 다른 원인이 있을 지도 모른다. 혹시 그것이 그림책의 출발점, 그리고 그림책의 발전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가 갖게 된 편견 때문은 아닐는지.
그림책의 출발은 어린이 책이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 앨리스가 언니가 읽고 있는 책을 슬쩍 보고는
“그림도 대화도 없는 책을 뭐 하러 보지?”
하고 말한다.
글로 가득 찬 책은 어린아이들에겐 지겨울 수밖에 없다. 그러던 차에 나타난 그림책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아이들은 그림을 통해 책과 친해질 수 있었고, 그림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갈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그림책은 1658년 보헤미아의 J.A.코메니우스가 지은 《세계도회(世界圖繪)》로 알려져 있다. 사물의 명칭을 그림으로 나타낸 최초의 교과서라고 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그림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림책의 새로운 지평을 연 케이트 그린어웨이와 랜돌프 칼데콧이 활동한 시기는 19세기 후반이었고, 본격적으로 그림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이었다.
이렇게 볼 때 그림책의 역사는 길지 않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 그림책의 역사는 더더욱 짧다. 일반적으로 해적판 외국 그림책이 들어오기 시작한 1980년대를 그 시작점으로 여긴다. 이후 전집을 중심으로 전래그림책이 나오기 시작했고, 1988년이 되어서야 최초의 창작 그림책으로 알려진 류재수의 《백두산 이야기》가 나왔다.
이 시기는 경제의 활성화와 함께 출판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때이다. 교육열 또한 더욱 치열해지던 시기다. 당연히 어린 시기부터 책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엄마들이 늘어났고, 그림책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졌다.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까지 그림책에 대한 관심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림책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어른들도 많아졌다. 그림책을 공부하며 그림책에 열광하던 많은 어른들 가운데는 어린아이를 둔 부모가 많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서 청소년이 되면서 그림책을 공부하던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그림책과 멀어졌다. 그림책에 열광했던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그림책 자체가 아니라 아이에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책 감상 연령대, 영화보다 폭넓다

그림책이란 참 특별한 분야다.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책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정의만을 생각한다면 그 어떤 분야보다도 가능성이 넓게 펼쳐진 책이다.
이처럼 그림책은 그 자체로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그림책을 보는 연령대나 교육적인 면 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향이 나타났다. 어린이 책에서 시작해서 발전을 이뤘다는 점 자체가 한계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그림책’이라 하면 창작 그림책을 떠올리지만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게 창작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다. 창작을 중심으로 민담, 과학, 인문, 역사……, 그림책은 그 어떤 것도 다 담아낼 수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들이 ‘초점 맞추기’ 그림책을 보듯이 각 연령대별로도 다양한 그림책이 나올 수 있다.
마치 스토리와 영상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영화에 다양한 장르가 존재하는 것과 같다. 연령대별로 골라 본다는 점에서는 전체 관람가, 12세 이상 관람가, 15세 이상 관람가……등으로 나누는 영화랑 닮은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림책은 영화보다는 볼 수 있는 연령대가 훨씬 자유롭다.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는 12세가 되기 전에는 볼 수 없지만 그림책은 그렇지 않다. 편의상 그림책을 권하는 연령대를 정하고 있긴 하지만 영화와 달리 법률적으로 효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편의상 어느 정도 연령층이 보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정도라 생각하면 된다.
초등학생이라도 유치원생에게 권하는 그림책을 볼 수 있고, 유치원생이라도 초등학생에게 권하는 그림책을 볼 수 있다. 어렸을 때 수십 번 이상 봤던 그림책이지만 몇 년이 흐른 뒤에 다시 보면 어렸을 때는 못 봤던 새로운 것이 눈에 띌 수도 있다. 유치원생이라도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무언가 있다면 초등학생이 볼 수 있는 그림책이라 해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결국 연령대를 한정 짓는 건 그림책이 어린아이들이 보는 책이라는 편견을 갖고 바라보는 우리 자신이 셈이다. 이런 편견은 그림책의 입지를 좁게 만든다.
영화가 전체, 12세 이상, 15세 이상……등으로 다양한 연령대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듯이 그림책 또한 다양한 형식의. 다양한 연령대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질 수 있다. ‘0~3세’ ‘4~6세’, ‘초등학생’을 염두에 둔 그림책 뿐 아니라 ‘청소년’, ‘어른’을 염두에 둔 그림책도 만들 수 있다. 물론 실제로 그림책을 보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 연령대랑 상관없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그림책이 ‘어린 아이들이 보는 책’이란 편견 때문에 한계에 부딪친다면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다.
생각해 보자. 이야기와 그림이 어우러진 그림책이라 해서 그 내용이 청소년이나 어른들의 관심과 고민을 담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당연히 청소년에게 알맞은 그림책, 어른들에게 권하고 싶은 그림책, 누구나 다 한번쯤 봤으면 하는 그림책 등 다양한 그림책이 존재할 수 있다.
사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초등학생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것도 낯설기만 했다. 심한 경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집에 있는 그림책은 다 치워 버리는 예도 있었다. 그림책이란 글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보는 책이란 편견이 초래한 결과였다.
다행히 지금은 초등학생을 위한 그림책은 많이 보편화됐다. 그림책이란 단지 어린 아이들만 보는 게 아니라는 인식이 조금씩 퍼져 나간 덕이다. 하지만 아직 청소년까지 올라오지는 못한 게 현실이다.
정말 아쉬운 일이다. 공부에 쫓겨 책을 읽을 시간이 적은 청소년기에 그림책은 위안이 될 수 있다. 그림책은 다른 책들보다 조금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반복해서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책이다. 그림책의 그림은 문학으로서의 가치와 함께 훌륭한 미술 감상 작품이기도 하다. 글로 이야기하는 방식과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림책이다.

이제 '청소년 그림책'에 도전할 때

다행히 요 근래에 그림책을 새롭게 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그림책이 어린아이들이나 초등학생이 보는 책이라는 한계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2002년에 마루벌에서 나온 ‘0100 갤러리’는 0세에서 100세까지 모든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그림책을 표방하고 있다. 각자 자기 나이대의 흥미와 능력만큼 즐길 수 있는 그림책이라는 것이다.
2011년 보림에서 나온 ‘The collection'도 비슷하다. 한정된 연령층과 시대의 유행을 벗어나 그림책 본래 기능을 되살리는 대안 그림책 시리즈를 표방하고 있다.
두 시리즈에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건 그림책의 대상 연령대를 어린아이들에서 벗어나 어른들까지 볼 수 있는 그림책으로 넓혔다는 점이다. 이렇듯 연령대가 넓어지면서 교육적인 면보다는 예술성과 미적 가치에 중점을 둘 수 있었고 그림책의 영역 또한 확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12년에 비룡소에서 나온 ‘zebra'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이미지, 감각적인 디자인이 어우러진 그림책 시리즈를 표방하고 있다. 앞의 두 시리즈와 경향은 좀 다르지만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비슷해 보인다. 어린아이들에 맞춰져 있었던 내용과 형식에서 벗어나 그림책이 갖고 있는 미적 형식에 중점을 둔 것이다.
이런 시리즈들이 이야기와 이미지라는 그림책의 두 가지 구성 요소 가운데 지나치게 ‘이미지’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면은 있다. 하지만 그동안 그림책이 갇혀 있던 연령의 한계를 벗어던지고 있다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연령대를 벗어던지려는 시도가 이미지에서 출발은 하지만 결국엔 이야기에서도 변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의 그림책 역사가 짧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나라에 그림책이 막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인 80년대에 세계 그림책의 역사에서는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이 그 시작일지 모른다. 10년 전 낯설기만 했던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이 지금은 많이 자연스러워진 것처럼 이제는 청소년들이 보는 그림책에 도전할 시기인 것이다.

중고등 학교도서관에 그림책이 있어야

중학교 1학년인 딸이 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지 며칠인가 지났을 때였다. 방학 동안 편하게 지내다 다시 다니기 시작한 학교가 꽤나 힘들었던 것 같다.하루는 피곤에 절어 들어오면서 말했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 우리 좀 쉬면서 같이 그림책 보자.”
“어? 이 그림책 옛날에 봤던 건데 이런 장면도 있었네. 이상하다. 그땐 왜 안 보였지?”
그리고는 이내 행복한 표정으로 잠이 들었다.
학교생활이 힘든 아이에게 그림책은 느긋하게 보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휴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와중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움을 찾아내기도 했다. 아이에게 그림책은 꼭 필요한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
다른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학교 도서관에 청소년들이 느긋하고도 만만하게, 그러면서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그림책이 충분히 들어오길 바란다.


이 글은 월간 《학교도서관저널》(2012년 10월, 통권 27)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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