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여우누이 그 오싹한 매력 속으로...

 

여름이다. 여름이면 생각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구미호’ 이야기다.
우리 옛이야기 가운데 구미호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이야기로 ‘여우누이’가 있다.
손에다 참기름을 바르고 말과 소의 밑구멍에 손을 쑥 넣어 간을 빼먹는 여우누이의 모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싹하다. 또한 집에서 쫓겨났던 막내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여우누이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올 여름, 다시 ‘여우누이’ 이야기를 읽었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여러 가지 생각과 의문이 교차한다. 그 몇 가지를 정리해봤다.

여우누이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옛날에 아들 삼 형제를 둔 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아들은 다 죽어도 딸을 두었으면 좋겠다고 할 만큼 딸 낳기가 소원이었다. 산신(서낭, 삼신할머니)은 아들 낳게 해 달라 비는 사람은 있어도 딸 낳기가 소원이라는 사람이 없는데 딸을 낳게 해 달라는 부부가 괘씸했다. 그래 구미여우(구미호)를 사람의 형상을 해서 낳게 해 줬다.

여우누이가 태어났다. 사람의 형상을 한 여우의 탄생. 여우누이는 비정상적 태생이다.
여우누이가 이렇듯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것은 부부의 그릇된 욕망 때문이다. 소와 말을 잔뜩 거느릴 만한 부잣집에 아들도 삼 형제를 뒀으니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다. 갖고 있는 것은 더 갖고 싶고, 갖지 못한 것은 더욱더 갖고 싶어 진다.. 그런데 부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싶은 욕망이 지나칠 정도로 커져서 사리분별도 하지 못한다. ‘아들은 다 죽어도 좋으니 딸 낳기’를 소원하고 딸이 태어나자 애지중지 딸만 바라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여우누이는 비정상적 태생으로 여우가 겉모습만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이다. 당연히 여우누이가 생명을 유지해나가는 방식은 보통의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여우누이는 살아있는 생명의 간을 빼어먹어야 한다. 이건 여우누이의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당연히 여우누이가 태어난 뒤부터 집안의 소와 말이 하나씩 죽어간다. 가족들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이지만 어쩌면 사람이 아니라 가축부터 잡아먹기 시작한 건 여우누이 나름의 배려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듯 살아있는 생명의 간을 빼먹는 여우누이는 필연적으로 사람들이 사는 공간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다. 여우누이는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주위의 생명을 해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입장에선 여우누이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셋째 아들이 찾아간, 폐허가 된 마을의 풍경에 괜히 마음 한편이 씁쓸해진다. 부부의 그릇된 욕망이 아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 이런 비극은 옛이야기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릇된 욕망은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지나친 욕심으로 생겨난 그릇된 욕망이 판단력을 흐린 채 절실한 필요성으로 포장되어 나와 주위를 폐허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늘 경계할 일이다.
여우누이가 불쌍해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그릇된 욕망의 결과가 만들어낸 여우누이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니 말이다.

진실을 외면하는 부모, 진실을 말하는 세 아들

딸을 낳은 후로는 웬일이지 하룻밤만 자고 나면 소랑 말이 죽고 죽고 했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오늘 밤 소와 말이 왜 죽는지 지켜보거라.”
부모님은 큰아들에게 명했다.
큰아들이 아무도 모르게 외양간을 지켜봤다.
자정 때쯤 되어 누이동생이 살그머니 나와 손과 팔에다 참기름을 듬뿍 바르더니 외양간에 들어가 말 밑구멍으로 손을 쑥 넣어서 간을 꺼내 먹었다. 그러니까 말은 그만 쓰러져 죽었다.
다음날 큰아들이 부모님께 본 대로 말했다.
그러자 부모님은 썩 호령하며 말했다.
“아니,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을 없애려고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 썩 나가거라!”

부모는 진실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집안의 재산인 소와 말이 죽어나가는 원인을 밝히고 싶지만 진실을 말하는 세 아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동생을 모함한다며 모두 쫓아내고 만다. 아들은 다 죽어도 딸을 두면 좋겠다는 말을 내뱉은 부모답다.
진실을 말했던 세 아들은 차례로 집안에서 쫓겨난다. 본격적인 시련이 닥친 것이다. 하지만 곧 이 시련은 행운이었음이 밝혀진다. 여우누이는 집안의 소와 말을 다 잡아먹은 뒤 부모를 잡아먹고, 심지어 생명이 있는 마을의 모든 것을 잡아먹고 주위를 폐허로 만든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고 쫓겨난 세 아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진실을 본 자와 진실을 보려는 마음이 없는 자의 운명은 이렇게 갈라졌다. 모르긴 몰라도 부모는 여우누이에게 잡아먹히는 순간까지도 진실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막내는 왜 집으로 돌아왔을까?

세월이 지난 뒤 막내아들은 고향집이 궁금해 가보고 싶어 한다. 용왕의 딸인 색시는 가봐야 아무것도 없을 테니 가지 말라며 남편을 말린다. 하지만 기어코 가보려는 남편을 말리지 못하자 파란 병, 하얀 병, 빨간 병 세 개를 주면서 급할 때 하나씩 뒤로 던지라고 했다.

‘나무꾼과 선녀’에서 나무꾼은 선녀가 말리는 걸 마다하고 고향집으로 간다. 선녀는 말을 내주면서 절대로 말에서 내리지 말라고 하지만 나무꾼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그리고 죽어서 수탉이 되고 만다.
‘여우누이’의 막내도 색시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집에 가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무꾼의 비극적 결말과 달리 막내아들은 여우누이를 물리치고 돌아온다. 똑같이 색시의 만류를 마다하고 고향집에 갔지만 결과가 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혹시 하늘나라와 물속 세계라는 공간의 차이와 관련은 없을까?
나무꾼은 선녀를 찾아 하늘나라로 간다. 판본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나무꾼은 선녀의 도움으로 단숨에 하늘나라에 살게 된다. 땅에서 살 때 돌봐준 쥐의 도움으로 선녀의 도움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나무꾼이 등장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나무꾼이 스스로 성장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가 없다. 나무꾼에게 하늘나라는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언제든지 하늘나라에서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반면 막내아들이 색시와 사는 세계는 물속이다. 물속은 잠재된 무의식의 공간이다. 막내아들은 물속에서 수년 동안 지내면서 내면의 힘을 길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색시에게 받은 세 개의 병도 제때에 차례로 던지고, 실수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부정적 여성성을 건강한 여성성을 통해 극복하는 이야기

‘여우누이’에는 두 명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여우누이와 용왕의 딸이다. 여우누이는 여성의 파괴적 측면을 보여주고, 용왕의 딸은 건강한 여성성을 보여준다.
여성의 파괴적 측면은 아무 근거 없이 등장하진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여우누이는 부모의 그릇된 욕망으로부터 나왔다.
세 아들은 부모를 보며 여우누이의 부정적 여성성을 내재화한다. 세 아들 가운데 두 아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한 아들이 세 번을 반복해서 보게 된 것이라 여겨도 좋다.
아무튼 막내아들은 거북이를 구해주고 그 대가로 용궁에 가서 용왕의 딸과 결혼해 생활하며 건강한 여성성을 통해 부정적 여성성을 극복해간다.
하지만 부정적 여성성과 직접 맞대결하지 않고서는 완전히 극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막내아들은 고향집에 여우누이만 있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고자 한다. 위협을 느끼면서도 여우누이가 잡아끄는 대로 방안에 들어가 밥상을 받기도 한다.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깨닫고 달아나지만 쉽지는 않다. 용왕의 딸이 준 세 개의 병을 차례로 다 던지고 나서야(혹은 그래도 그 뒤에 삼족구가 도와주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가시덤불과 같은 곤경과 장벽에 부딪치기도 하고, 큰 물결에 휩쓸려 허우적대기도 하고, 그러다 결국엔 불로 부정적 여성성인 여우누이를 죽여 없애고 난 뒤에야 극복할 수 있었다.
여기서 가시덤불, 물, 불은 여우누이를 물리치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막내아들이 겪어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삶의 장애라 할 수 있는 가시덤불은 집에서 내쫓기는 상황으로, 물은 용왕의 사위가 되어 살아가며 무의식의 힘을 기르는 과정으로, 불은 정화의 의미로 완전히 극복했음을 상징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우누이’ 이야기는 《한국구전설화 1-12》(평민사)와 《구비문학대계》의 자료를 참조해 봤다.
쉽게 읽어볼 수 있는 그림책도 함께 봤다. 의외로 단행본으론 세 권 밖에 없다.

<여우누이>(이성실 글/박완숙 그림/보림/1997)
<여우누이>(김성민 글, 그림/사계절/2005)
<여우누이>(이미애 글/허태준 그림/2006)

그리고 전집 호롱불 옛이야기 가운데 <여우누이>(정해왕 글/유승하 그림/웅진닷컴/2003)
'여우누이' 이야기를 작가가 새롭게 해석해서 만든 <끝지>(이형진 글, 그림/느림보/2003)

다음 기회엔 그림책을 견줘서 살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