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의 진정한 힘

 

 2015년 한 해, <한국구전설화 7-전라북도 편 1>을 보며 자꾸 신경이 쓰이던 이야기가 있다. 바로 ‘변신’ 이야기다.
2012년에 이미 한 번 정리했던 이야기지만 당시 정리를 하면서 뭔가 마음 한 편이 께름칙했기 때문이다. 변신의 이미지 속에 ‘자기 변신’이라는 이름으로 자꾸 변절의 모습이 끼어 들곤 했다.
심리학자인 리프톤이 처음 명명했다는, ‘프로테우스적 인간’이란 말 때문이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그때그때 새로운 가치관에 자기를 맞추어 나가며 변화무쌍한 생활을 하는 현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자신의 가치관이 아닌 그때그때 변하는 사회의 가치관에 맞춰 변화하는 삶은 변신이 아니라 변절이었다. 당시 인터넷으로 검색한 '프로테우스적 인간'의 예 때문이었다.  

어떤 남성이 중고등학교 시절엔 학력주의나 입신출세주의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전통주의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미국으로 유학 가서 미국생활을 하면서 기독교도로서 세례 받고 귀국하였다. 그는 또 다시 전통문화에 흥미를 느껴 대학에 재입학하였고 입학 후 학생운동가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대학생활에 흥미를 못 느끼고 방황하다가 졸업할 때가 되어 자기가 가장 싫어하고 배척했던 대기업에 입사한다.

 바다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때그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신을 하는 것과 위의 예는 전혀 다른 상황이라 여겨졌다.
그 뒤 머릿속에는 ‘프로테우스적 인간’이란 말이 엉킨 실타래처럼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고민을 해 보지도 못 한 채 말이다. 그리고 올해 <한국구전설화 7 - 전라북도 편 1>에 등장하는 많은 변신 이야기들을 보며 다시 ‘프로테우스적 인간’이란 말이 떠올랐다.

<한국구전설화 7 - 전라북도편 1>에는 많은 변신 이야기가 등장한다. 가장 많은 이야기는 동물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이른바 둔갑 이야기다. 둔갑은 변신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둔갑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일시적으로 모습이 바뀌는 거라면 변신은 본질적인 부분이 바뀌는 거라고 할 수 있다.

오비디우스는 <변신이야기>에서 ‘모습을 바꾸는 데는 한번 그 모습이 바뀌면 영원히 그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변신이 있고, 수시로 그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둔갑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풀이하자면 장자못 이야기처럼 돌이 된 며느리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보상으로 꽃이나 새가 된 이야기, ‘우렁이와 각시’에서 파랑새가 된 각시와 신랑 이야기는 변신 이야기다. ‘구렁덩덩 신선비’나 ‘두꺼비 신랑’에서 구렁이와 두꺼비가 신랑으로 변하는 것도 변신이다. 반면 ‘여우 누이’의 여우나 ‘괴서’ 혹은 ‘옹고집’에 등장하는 쥐나 허수아비는 변신이 아닌 둔갑 이야기다. 반면 ‘인호’의 경우 시작은 둔갑이었지만 결말은 변신으로 끝을 맺는다.(참고로 우리 둔갑 이야기에서는 주로 동물이 사람으로 둔갑을 하는데, 서양의 경우는 동물이 사람으로 둔갑하는 경우는 없다. 사람이 마법에 걸려 동물로 변하지만 나중에 마법이 풀리면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유형들이 주를 이룬다.)

이렇게 변신과 둔갑의 차이를 짚고 나니 변신 이야기를 공부하며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프로테우스적 인간’의 문제도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는 본래의 모습을 잘 모를 만큼 둔갑에 능수능란하다. 하지만 둔갑은 어디까지나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일시적인 방책일 뿐이다.
현대인이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변신이 필요한 건 분명 사실이다. 세계가 바뀌었으니 가치관이나 생활 방식도 바뀌었고, 그 바뀐 세계에 맞춰 변해야만 세계에 적응을 하고 살아나갈 수 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 변할수록 점점 더 빨리 변해야 하고 말이다. 변화된 세상에서 변신을 거부한 채 있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현대인을 가리켜 괜히 ‘프로테우스적 인간’이란 말하는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때그때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얍삽한 변신을 하느냐, 아니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변신을 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우스갯 말로 아들이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생활 태도가 바뀌어서 처음엔 ‘얘가 변했구나’하고 생각했는데, 일주일도 채 못 되어서 본색을 드러낸다고들 한다. 이런 경우 역시 변신이 아니라 잠시 둔갑했던 거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둔갑과 변신의 차이는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쁜지에 대한 차이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라만 본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얼마 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였다.
“바라만 본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 문구는 ‘히트’라는 게임 광고의 문구였다. 어떤 게임인지도 전혀 모르지만 그 문구만큼은 내 뒤통수를 제대로 한 대 쳐주었다.
역사책 국정화니,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세월호의 문제니, 복면금지니, 게다가 백골단을 다시 부활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계속되고 있는 분위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현안들에 대해 불평불만만 늘어놓았던 내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과연 이런 문제에 맞섰을 때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생각해 보니 정말이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광고 문구 말마따나 나는 지금껏 세상을 바라만 보며 바뀌지 않는 세상을 원망만 한 셈이었다. 누군가 바꿔주길 바라며 나 자신은 이런 저런 핑계로 세상에 안주하면서 말이다.
그동안 계속 ‘나도 변신이 필요해’하고 변신을 하려 나름 노력을 하긴 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만 한정되어 있었을 뿐, 세상을 바꾸는 것과는 동떨어져있었던 셈이다.
게임 광고 문구가 준 깨달음, 그것은 정말 변신다운 변신은 나 자신의 변신이 세상의 변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변신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그래서 스스로 능동적으로, 내면에서부터 모두 변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반드시 처음부터 세상의 변신까지 염두에 두고 변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개인의 변신이 먼저이고, 나의 변신의 결과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조금 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광고 문구에는 ‘변신’이란 말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변신을 떠올렸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바뀌다’ ‘변한다’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변신과 둔갑의 차이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했지만, 일상생활에서 변신과 둔갑, 그리고 변화, 바뀜 등은 같은 의미로 통용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구전설화 7 - 전라북도 편 1>에는 장닭이 된 결말로 끝나는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가 있다. ‘나무꾼과 선녀’는 여러 각편이 있다. 하늘로 올라간 나무꾼이 선녀의 도움으로 장인장모의 시험을 통과한 경우는 하늘나라에서 잘 살다가도 결국엔 여기서처럼 장닭(수탉)으로 변하고 만다. 하지만 처음엔 선녀의 도움으로 시험을 치르지만 나중엔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는 하늘나라에서 계속 잘 살게 된다. 나무꾼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변한 덕에 하늘나라에서 인간세계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규칙도 깨질 수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 경우, 나무꾼의 변신이 세상을 바꾼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변신이란 주제와는 전혀 관계없지만 도정일 교수는 <언어, 문학, 문화--두꺼비의 헌집과 새집--21세기 영문학 교육의 방향 모색>이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변화라 함은 ‘변화’(change)의 영역인 미래를 전적으로 우연성의 놀이에 내맡기지 않고 어떤 의도, 어떤 원칙, 어떤 비전의 안내 아래 ‘만들어내기’ 위해 현재와 과거의 자료들을 부단히 바꾸고 창조적으로 변형시킨다는 의미의 ‘변화’(transformation)이다. 이 의미의 변화는 이미 있는 것을 바꾸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구지가」가가 노래한 “헌집 줄께 새집 다오”의 두꺼비처럼 헌집을 새집으로 바꿔내기이다. 그러므로 ‘변화의 능력’(ability to transform)은 무쌍한 프로테우스적 변신의 재능 아닌 ‘바꾸기의 능력’이다.

옛이야기 가운데는 나무꾼처럼 프로테우스적 변신이 아닌 변화의 능력을 발휘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한국구전설화 7 - 전라북도 편 1>에 실린 ‘구렁덩덩 새선비’의 각시 역시도 변화된 모습으로 시선비와 재결합할 수 있었다. 남편이 소박을 놓으면 그걸 숙명이라 받아들이고 살아가던 여성들의 모습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그동안 변신 이야기에서 모습이 바뀌는 것만 봐 왔는데, 실은 진짜 변신은 겉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둔갑 능력이 없는 나무꾼이 하늘나라의 규칙을 바꾼 거나, 새신랑으로 모습을 바꾼 구렁덩덩 신선비였지만 진짜 참다운 변신을 한 건 신선비가 아닌 각시였다는 사실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옛이야기모임 '팥죽할머니'는 매해 연말에  '똘배아동문학회' 와 함께 1년 동안 공부한 것을 함께 나누는 자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5년 모임에서 발표한 것으로, 2012년에 발표한 '변신 1 - 변신이 필요할 때'에서 개운하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 정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