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이 필요한 때

 

 1.
1년 가까이 변신 이야기를 읽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
"나에게는 변신이 필요하다!"

세상은 참 빠르게 변한다. 때로는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오랜만에 간 은행에서는 어느쪽 대기표를 뽑아야 할 지 한참을 고민하게 된다 날마다 타는 지하철이지만 어쩌다 교통카드를 집에 두고 오는 바람에 일호용 표를 끊어야 할 때면, 표 끊는 방식이 너무 낯설고 어려워 당황스럽다. 그때마다 자괴감이 밀려온다. 이대로라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어린이 책을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어린이 책을 보기 시작한 지 어언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어떤 작품은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 힘들다. 책을 읽고 정리를 하는 일도 버거운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글을 쓰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게 점점 어려워지기만 한다.
달리는 차창 밖의 풍경처럼 계속 뒤로 밀리는 느낌? 세상은 변하는데 나만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다. 변하는 세상에 관심을 갖고 적극 나설 필요도 느낀다. 하지만 그건 머릿속에서일뿐, 행동은 뒤로 물러설 때가 많다. 낯설고 불편한 느낌이 들면 나도 모르게 어떻게든 피해보려 한다.
아, 물론 뒤로 밀려나 있다고 나쁘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안다. 주위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그야말로 어정쩡한 상태다. 머리로는 '그러면 안 돼!' 하면서도 불편하고 낯선 장소는 자꾸 피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낯설고 불편해질 때가 많다.
어린이책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점점 낯설고 어려울 때가 많아지고 있다. 적어도 달리는 차와 비슷하게는 달려줘야 할 것 같은데, 이젠 달리는 차를 시야에서 보기 힘들어질 것만 같다.
문제는 이 모든 게 나 자신으로부터 생긴 것이라는 점이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예전보다는 확실히 나태해진 걸 알기에 누굴 원망할 수도 없다. 머리는 전진을 외치지만 몸은 정지해 있는 꼴이다. 그나마 모임을 할 때면 신선한 자극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돌아오지만, 다잡은 마음은 오래 가지 못한다. 결국 도로아미타불이다.
세상 만물은 변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변했다. 아주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2.

"변신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알몸의 원시로 돌아가야 한다. 선녀가 사람이 될 때는 알몸이었고, 아마 선녀로 되돌아갈 때도 그녀는 알몸이었을 것이다."
                                                                 《변신 이야기》(한상일/밀알)

알몸이 된다는 것, 그건 '자신을 내려놓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
옛이야기에서 변신은 아주 한순간 일어난다. "수리수리 마수리 얍!" 하면 바로 "얍!" 하는 순간에 변신이 일어난다. "얍!" 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변신은 신기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얍!" 하는 순간에 변신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 변신이 정말 일순간에 일어나는 건 아닐 것이다. "얍!" 앞에 붙은 "수리수리 마수리"가 괜히 붙을 리가 없다. 변신을 위해서는 변신이 일어나는 내재적인 변화의 과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수리수리 마수리"는 밖에서 볼 땐 아직 변신이 일어나지 못했지만 그 변신을 준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선녀가 선녀 옷을 포기하고 나무꾼을 따라가기로 단박에 마음을 먹진 않았을 게 뻔하다. 마음 속으로 수백 수천 번을 '나무꾼을 따라 갈까 말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선녀 옷이 없이 선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선녀였던 자신을 내려놓고 쉽게 낯선 나무꾼을 따라가는 것 또한 스스로 허락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녀 옷을 잃어 버린 지금,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 없는 처지에선 선녀였던 자신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다시 선녀 옷을 받았을 때도 처음처럼 고민이 많았을지는 알 수 없다. 지금껏 자신을 속인 나무꾼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래도 사는 동안 쌓인 정 때문에 고민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선녀 옷을 입고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기가로 마음먹는 순간, 자신이 인간이 되는 순간부터 함께 살아왔던 나무꾼을 내 버려둔 채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분신인 아이들과 함께. 선녀에서 인간으로, 다시 선녀로. 선녀는 필요한 순간, 최선의 선택으로 변신을 했다.

이야기가 길었다. 결국 변화와 변신에 대한 고민이다. 지난 마지막 모임이 끝난 뒤, 변화와 변신의 차이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됐다. 아무래도 변화와 변신은 다른 개념인데 혼용해서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름 혼자서 내린 결론!"
변화가 없는 변신은 있을 수 없다!
변화는 변신의 과정!
뭐 이런 게 아닐까 싶어졌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변화만 있고 변신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바로 나처럼 말이다. 분명 변화는 있지만 변신이 필요한 결정적 순간에 늘 머뭇머뭇하며 늘어지기만 한다.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에게 보이는 내 모습, 내가 그려놓은 내 모습에 갇혀서 나를 내려놓지 못하니 변신이 필요한 순간에도 변신을 거부하고 가면을 쓴 채 '~한 척' 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3.
《변신 이야기》(이상일/밀알)에 '프로테우스적 인간'이란 말이 나온다. 프로테우스적 인간이란 심리학자인 리프톤이 처음 명명한 말로,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그때그때 새로운 가치관에 자신을 맞추어 나가며 변화무쌍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프로테우스적 인간'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쓰이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포세이돈의 신하로 변신의 귀재였던 프로테우스. 과연 그는 변신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 버렸을까? 혹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변신을 했던 건 아니었을까?(프로테우스적 인간에 대해서는 좀더 확인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찾은 자료만으로는 부정적인 느낌이 들지만 본래 프로테우스를 생각할 때 부정적인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프로테우스는 변신의 귀재이기에 앞서 예언자이자 현자로 존경을 받던 신이다. 그래서 신과 영웅들 가운데는 프로테우스에게 궁금할 걸 듣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언은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법. 하지만 이를 어기고 프로테우스를 강제로 잡아서라도 예언을 듣고자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마다 프로테우스는 여러 모습으로 변신을 해서 빠져나가곤 했다.
그러니 프로테우스의 본 모습과 '프로테우스적 인간'이란 말과는 큰 차이가 있다. 프로테우스가 변신을 한 건 그때그때 새로운 가치관에 자기를 맞추어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부조리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쯤에서 《26년 1-3》(강풀/문학세계사)에 등장하는 회장이 떠오른다. 광주로부터 26년 후, 겉모습만으로는 그가 계엄군으로 광주에서 시민을 죽이고 괴로워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없다. 잘 나가는 대기업 회장으로 지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속은 달랐다. 그는 26년 전 광주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잘 나가는 대기업 회장으로 출세하려 했던 이유는 그만한 자리에 올라야만 광주 대학살의 책임자였던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그의 변신은 자신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변신이었다. 프로테우스처럼.

4.
어찌 보면 변신에는 결단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실행력이 약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특히나!
'바보 이야기'가 생각난다.
담뱃대를 들고 가면서도 담뱃대를 든 손이 뒤로 가서 안 보이면 "어? 내 담뱃대 어디 갔지?" 하고, 다시 담뱃대를 든 손이 앞으로 와서 보이면 "아, 여기 있구나!" 할 정도로 정신없는 바보 이야기 말이다. 길을 가는 내내 귀찮게 "어디 있는 중이요?"하고 물어대던 바보가 귀찮았던 중은 주막에 함께 묵으면서 바보의 머리를 빡빡 깎고 자기가 입고 있던 승복을 입혀놓고는 줄행랑을 쳤다.
"중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자기 모습을 본 바보가 한 말이다. 기가 막히게 답답한 상황이다. 그런데 어쩐지 앞으로 바보는 더 이상 바보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엔 이 정도의 바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게 뻔하다 여겼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어쩌면 바보도 그동안 살면서 스스로 엄청 답답해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기에 생각을 못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계기가 생겼다. 열 받은 중 덕분에 바보는 자신도 모르게 중의 모습으로 변신을 하게 됐고, 자신의 본 모습과 겉모습과의 차이로 고민을 하게 됐다. 바보가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물꼬가 트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때로는 누군가 강제로 변신을 시켜주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도 그랬지 않은가? 게으름뱅이가 개과천선 하게 된 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로 변신을 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도 혹시 이런 강제적인 변신이 필요한 건 아니겠지?

5.
그러고 보니 옛이야기에는 참 많은 변신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엔 '둔갑' 이야기만을 변신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변신 이야기의 폭은 넓다.
때로는 변신이 불행한 결과를 낳는 이야기도 있다. '황호랑이 이야기에서 아들은 병든 어머니를 위해 경을 외어 호랑이로 변신을 해서 날마다 개를 잡아왔다. 부인은 호랑이로 변하는 남편이 무서웠다. 그래서 남편이 호랑이로 변해 있는 사이에 경을 불태워 버렸고, 남편은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호랑이로 불행한 삶을 살다 죽는다.
처음 이 이야기를 봤을 땐 '또 여자 때문에 망쳤다는 거야?" 하고 화가 먼저 났다. 하지만 한참을 읽다 보니 부인이 경을 불태운 건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변신은 엄밀히 말해 내면의 변화를 전제로 한 변신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둔갑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우 누이'의 누이는 소나 말 혹은 사람을 잡아먹을 때만 여우로 변하고, '여우 잡은 지팡이'에 나오는 여우는 잔칫집에 가서 주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서 사람 모습으로 변한다. 아들이 호랑이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들의 변신은 자기 내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변신의 방법도 자기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책을 보고 경을 외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책이 없어지자 경을 외울 수 없어 사람으로 돌아오질 못했다.
그래서일까? 세 이야기는 모두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 여우누이는 셋째 오빠 때문에, 할머니로 변한 여우는 지팡이를 들고 있던 아이 때문에, 아들은 경을 불사른 부인 때문에.
기왕이면 '바보 이야기'나 '소가 된 게으름뱅이'처럼 타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변신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변신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반드시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자의에 의한 변신이라도 변신을 위한 내면의 변화(긍정적인 의미에서!)가 없이 불순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변신이라면 당장에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국 해가 될 수밖에 없다.
'콩쥐 팥쥐'에서 콩지가 연꽃으로, 구슬로 변하는 건 '황호랑이'와는 또 다르다. 콩쥐의 변신은 억울한 죽음 뒤에 오는 변신 이야기와 비슷한 모양이긴 하지만 다시 콩쥐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점에서 억울한 죽음 뒤에 오는 변신과는 전혀 다르다. 콩쥐가 처음으로 변신을 했던 것이 연꽃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자, 그럼 차례대로 이야기의 의미를 생각하며 콩쥐의 변신은 '새롭게 다시 태어남'이다. 불살라진 뒤에 다시 구슬로 변신을 하는 모습은 마치 흙이 불에 구워져 단단한 도자기가 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역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그리고 연꽃이 되었을 때나 구슬이 되었을 때나 한결같이 사또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걸 봐서 콩주의 본질은 그대로다. 결국 콩쥐는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변신을 하면서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시켜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그런데 옛이야기 가운데는 자신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사는 누군가를 변신시키는 이야기도 있다. '우렁 색시'나 '나무꾼과 선녀' 같은 이야기들이다.
이 두 이야기의 주인공을 여자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야기 전체를 꼼꼼히 살펴 본다면 기본적으로는 남자의 소망이 그 출발이다. "이 김을 매서 누구하고 먹고 사노?" 하는 푸념에서 우렁색시를 만나게 됐고, 사냥꾼으로부터 노루를 구해준 보답으로 나무꾼은 선녀를 색시로 맞는다.
두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내가 아닌 상대의 변신으로 주인공의 상황이 바뀐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유난기 각편이 많은 이야기들이라는 점이다.
우렁색시의 경우 색시가 감사와 잘 살고 남자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는 이야기도 있고, 남자와 색시가 모두 죽는 이야기도 있고, 남자가 참빗이 되는 이야기도 있고, 재주를 익혀 색시를 찾아가 원님을 물리치고 색시도 찾고 원님 자리도 차지하는 이야기도 있다.
나무꾼과 선녀는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 버리자 그냥 포기하는 이야기도 있고, 두레박을 타고 하늘나라에 올라가지만 어머니를 보러 땅에 내려왔다가 수탉이 되는 이야기도 있고, 하늘나라에서 잘 살게 되는 이야기도 있다.
같은 이야기지만 이처럼 유독 각편이 많은 데에는 까닭이 있어 보인다. 상대의 번신으로 상황은 변했지만 중요한 건 여전히 주인공이고, 주인공 내면의 성장 여부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각편을 견주어 보면 주인공의 태도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변신 이야기를 읽을 땐 변신이 주는 재미 때문에 봤는데, 읽다 보니 결국 변신 이야기는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살아가는 데에는 '한결같음'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변신' 역시 필요하다. 콩쥐가 연꽃으로, 구슬로 변하면서 자신을 지켜내며 성장했듯이 말이다.
그런 변신을 위해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제가 활동하고 있는 옛이야기모임 '팥죽할머니'는 매해 연말에  '똘배아동문학회' 와 함께 1년 동안 공부한 것을 함께 나누는 자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2년 모임에서 발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