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마구라는 괴물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조마구’란 이야기를 아시나요? 조마구는 지금껏 단 12편만이 채록 되어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 번 듣고 나면 강렬한 인상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조마구’ 이야기를 잘 모르겠다면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두 이야기는 괴물의 모습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구조는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1. 조마구가 어머니를 죽인다.(시체를 감나무에 걸어 놓거나, 어머니를 죽여 고깃국으로 끓여놓아 아이가 멋모르고 먹게 한다.)
2. 아이는 조마구를 찾아 길을 떠난다.(아이는 힘든 일을 해 주는 대가로 조마구의 거주지를 알아나간다.)
3. 조마구가 밥, 떡 등을 해서 먹으려고 할 때마다 아이가 그 음식을 먹어치워 조마구는 굶고 만다.
4. 조마구가 가마솥에 들어가 자려고 하자 아이는 가마솥에 불을 때서 조마구를 죽인다.

  자, 그럼 차례대로 이야기의 의미를 생각하며 읽어보도록 해요.

  첫 번째입니다. 조마구는 왜 어머니를 죽인 걸까요?
  어떤 이야기는 조마구를 처음부터 커다란 괴물로 그리지 않습니다. 부엌에 몰래 들어와 가마솥의 밥을 푹푹 퍼먹는 것을 본 어머니가 부지깽이로 조마구를 후려칩니다. 이렇게 후려칠 때마다 조마구는 몸이 쑥쑥 커지지요. 결국 커다란 괴물이 된 조마구는 어머니를 죽여 감나무(대추나무)에 걸어놓고 사라집니다.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아들이 나무를 하고 돌아오니 부엌에 빨간 고깃국이 있어 그것을 배불리 먹었는데, 알고 보니 어머니의 몸이었습니다. 빨간 빨래는 어머니의 가죽이었습니다.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조마구가 막내에게 가족들이 어디에 갔는지를 다 묻고, 어머니가 돌아오자 어머니를 죽이고 사라집니다.
  이야기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조마구는 처음부터 어머니만을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아니, 적어도 어머니와 뭔가 관련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조마구는 어머니에게 맞을 때마다 점점 커지고, 다른 식구가 있어도 어머니만 죽입니다. 가마솥의 밥을 먹거나 고깃국(?)을 만들어 놓습니다.  
  무척 끔찍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조마구와 어머니와는  분명 관련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아이는 어머니를 죽인 조마구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이 부분만 떼어놓고 보자면 어머니를 죽인 원수를 찾아나서는 영웅담처럼 보입니다. 아이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물어물어 조마구를 찾아갑니다. 그 누구도 아무런 대가 없이 길을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구렁덩덩 신선비’에서 새색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구렁덩덩 신선비를 찾아갈 때 겪었던 어려움을 아이도 고스란히 겪습니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아이는 분명 단단하게 성장했을 겁니다.

  세 번째, 아이가 조마구 집에 도착한 뒤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는 조마구 앞에 처음부터 나서지 않습니다. 부엌 선반 위에 올라가 숨거나 다락에 숨습니다. 조마구는 밥이나 떡을 해서 먹으려고 하지요. 그런데 주걱이나 칼 등이 없어서 이를 빌리러 나갑니다. 그 사이 아이는 조마구가 해 놓은 음식을 모두 먹어버립니다(가져갑니다). 조마구가 돌아왔을 때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 조마구는 몇 번을 연거푸 굶고 맙니다.
  어머니의 원수를 만났지만 단번에 나서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또 조마구가 해 놓은 음식을 몰래 먹어치우고 조마구가 혼란에 빠지게 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가 조마구를 상대할 만큼 성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말장난과 같은 화소들은 이야기의 또 다른 재미를 줍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음식을 둘러싸고 조마구와 아이가 벌이는 실랑이가 첫 번째 부분과 겹쳐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처음에 조마구는 부엌에 몰래 들어와 어머니가 해 놓은 밥을 다 먹어치웠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조마구가 어머니처럼 음식을 하고, 아이가 이 음식을 몰래 먹어치웁니다.
  첫 부분에서 느꼈던 것처럼 조마구와 어머니 사이에는 뭔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또 아이와도 뭔가 관계가 있고 말이에요.

  네 번째, 조마구는 빈대와 벼룩을 피해 가마솥으로 들어가고, 아이는 불을 때서 가마솥 안의 조마구를 죽입니다. 드디어 어머니의 원수를 갚은 셈입니다.
  그런데 왜 조마구는 가마솥에 들어가 불에 죽게 되었을까요? 오정아는 석사학위논문 <조마구 설화>에서 솥은 동굴처럼 빛이 없는 암흑의 공간이며 죽음의 공간이고, 불에 의해 죽음과 같은 시련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불은 죽음과 재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삶과 죽음, 창조와 파괴를 모두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마구가 솥 안에 들어가 죽는 것을  ‘죽음과 재생의 통과 제의’로 보고 있습니다. 또 하나, 어머니의 죽음과 괴물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합니다.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지금까지 조마구와 어머니 그리고 아이 사이에 놓였던 연결 고리를 발견한 느낌입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 조마구가 부엌에 들어와 음식을 먹어치우자, 이를 보고 화를 내며 조마구를 후려치던 어머니 모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전 이 모습에서 어머니가 막 준비한 음식을 마구 지범거리다 혼나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제사나 잔칫날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어머니 곁에서 하나씩 음식을 지범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음식은 도저히 쌓이지를 않습니다. 하는 사람 따로, 먹는 사람 따로 있다 보면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열을 받을 수밖에요. 음식을 준비하는 어머니는 그런 아이를 호되게 야단치지만 아이는 그래도 멈추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엄마가 폭발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조마구’를 보며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떠올랐던 건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이지만, 저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어머니가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것을 어머니가 내면의 동물적이고 폭력적인 본성에 잡아먹힌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다 해 주었지만 그건 어머니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지냈기에 가능한 부분일 겁니다. 뭔가 다른 쪽으로 해소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어머니는 어느 한 순간, 지금까지의 모습을 부정하며 폭발했고 그것이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지요.
  ‘조마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조마구는 아이를 위해 맹목적인 희생을 하던(여기서는 음식을 해주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지요. 오정아 역시 조마구를 ‘자아의 어두운 그림자’로 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내면이 키워낸 괴물입니다. 내면의 분노는 잘 다스릴 때는 크게 문제가 안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작은 조마구를 두들겨 팹니다. 그때마다 조마구는 점점 커지고요. 마치 우리가 분한 감정을 느낄 때 그 감정을 터트리면 터트리는 만큼 점점 더 커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결국엔 그 분노가 자신을 죽이고 말지요.(화병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어머니는 아마도 어느 정도 컸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여전히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겁니다. 아이의 미성숙한 모습은 조마구가 음식을 지범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고요.
  게다가 조마구가 어머니를 찢어 나무에 걸어놓은 장면과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호랑이가 하늘에서 떨어져 수숫대를 붉게 물들인 장면은 묘하게 서로 겹쳐집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아이들이 하늘에 올라간 것으로 끝이 났다면, ‘조마구’에서는 구체적으로 한 발 더 내딛습니다. 조마구를 잡으러 집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훌쩍 성숙해져 결국엔 조마구를 죽이고 돌아옵니다.
  조마구를 죽인다는 것, 그건 어머니와 아이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아이들이란 어머니 생각처럼 언제까지나 음식을 지범거리는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겁니다. 아이는 결국 성장을 합니다. 그리고 조마구가 죽음으로써 어머니가 조마구처럼 여겼던 아이의 모습은 사라집니다.
  아이 입장에서 조마구의 죽음은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죽이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자라면서 어머니에 대한 신뢰는 점점 줄어듭니다. 어머니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 또한 생깁니다. 이른바 ‘우리 엄마 맞아?’ 병이 생기는 것이지요. 이 증세는 사춘기 때를 전후로 극대화 되지만 결국엔 어머니의 긍정적인 모습과 부정적인 모습을 모두 어머니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조마구’에서 아이는 솥에다 불을 때서 조마구를 죽임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이겨낸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오호선이 쓴 《조마구》(길벗어린이)는 재미있습니다. 어린이 책에서는 감히 엄두내기 힘들었을 내용(어머니를 죽여 나무에 걸어놓는)도 글로 표현했습니다. 조마구란 캐릭터는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검뎅이먼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호선의 장기인 말놀이도 충분히 발휘되었습니다.
  하지만 뭔가 찜찜했습니다. 오호선이 쓴 《조마구》에서 아이들은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누이가 조마구를 잡으러 갈 때 함께 가는 바늘은 어머니의 분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즉 오누이는 자신들의 힘만으로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떠나는 것이지요. 게다가 길을 찾아 주는 갈퀴는 뜬금없습니다. 물론 여러 판본들 가운데는 갈퀴가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국구전설화 10》(평민사)의 ‘열댓 발 되는 새’ 와 《구비문학대계 8-2》(한국학연구소)의 ‘꼬랭이 닷 발 주딩이 닷 발’에는 갈퀴가 나옵니다. 이 갈퀴는 처음부터 아이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열심히 일을 해주며 길을 물어물어 갔을 때 마지막 일을 해 주고 받은 물건입니다. 하지만 오호선의 《조마구》에서 아이들은 처음부터 갈퀴가 안내하는 대로, 일 같은 건 하지 않고 편안히 조마구 집을 찾습니다. 또 조마구를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바늘입니다. 바늘은 조마구를 찔러서 가마솥에 들어가게 합니다.
  또 오호선의 《조마구》에서 조마구 집의 곳간에는 온갖 보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오누이는 조마구의 보물을 모두 가져와 행복하게 삽니다. ‘땅 속 나라 도둑 괴물’과 같은 ‘용 퇴치 설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입니다. 물론 ‘조마구’는 ‘용 퇴치 설화’와 ‘결핍-과제-과제성취-결핍의 제거’라는 동일한 구조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 구조라고 해서 같은 의미를 지니는 건 아닙니다. 채록된 ‘조마구’ 이야기에는 이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새로운 화소가 들어가 이야기의 의미를 또렷하게 해 줄 수도 있지만, 이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경우, 조마구의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6장면 :
  오누이가 눈을 떠 보니 파란 기와집이 보였습니다.
  기와집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겨 왔습니다.
  오누이가 집으로 들어가니, 곳간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첫 번째 곳간을 열어 보았습니다. 금덩이 은덩이에 보물이란 보물이 번쩍번쩍 빛나서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 곳간을 열어 보았습니다. 빨갛고 노랗고 푸른 온갖 과일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습니다.
  세 번째 곳간을 열어 보았습니다. 길고 뚱뚱한 항아리마다 꿀과 기름이 가득 차서 줄줄 흘러넘쳤습니다.
 오누이는 꼭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17장면 :
 용감한 오빠와 지혜로운 누이는 조마구의 보물을 모두 가져와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오누이 집은 환하게 빛났습니다.

  오호선은 열일곱 장면 가운데 두 장면을 여기에 할애했습니다. 결코 적지 않은 분량입니다. 조마구의 곳간은 환성적이고, 마지막 장면에서 이 모든 건 아이들 차지가 됩니다. 이야기의 다른 어떤 장면보다 강렬하고 인상적입니다. 아이들이 이 책을 읽었을 때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을지 궁금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더구나 여러 판본이 있는 이야기는 어떤 판본을 중심에 두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제 생각만 맞고 오호선의 이야기가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쉽습니다. 옛이야기라기보다는 창작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조금은 옛이야기에 더 가까운 ‘조마구’를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