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와 아이의 자아 찾기
- 해와 달이 된 오누

 

해와 달이 된 오누이 -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만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죠.
저는 그동안 이 이야기를 해와 달의 생성에 관한 신화적 의미로, 혹은 민속학적 관점에서 민중을 겁탈하는 지배자와 민중의 이야기로만 봐 왔어요.
그러다 《융, 호랑이 탄 한국인과 놀다》(이나미 글/민음인)를 보면서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됐지요. 이나미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잘 포장된 자식 사랑의 이기적인
뒷모습에 대해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로 읽고 있어요. 즉 아이를 잘 키운다는 명목으로 때론 비루하게 또 때론 포악하게 변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녀를 학대하고 착취하면서도 이게 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강변하는 게 바로 어머니라는 거지요. 반대로 독립적 삶을 피하면서 부모를 착취하는 영원한 아이 같은 자식도 있다고 해요. 효심 때문이라며 영악하게 자신의 의존심을 포장하고서 말이에요. 그리고 떡 하나라도 더 먹이겠다며 고개를 힘들게 넘고 넘던 어머니가 아이들을 잡아먹는 나쁜 호랑이 어머니로 변하는 것도 순식간이라고 말해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호랑이와 엄마가 같은 인물이라는 주장은 조금은 당황스러웠어요. 그래서 자꾸자꾸 생각을 해 보게 됐지요. 이나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때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면서요. 그러다 저는 이 이야기가 ‘아이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와 아이의 자아 찾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어요.

엄마가 시집간 딸네 집에 갔다오는 길이었다고?

제가 이야기를 이렇게 보게 된 건 《융, 호랑이 탄 한국인과 놀다》에서 시작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한국구전설화11. 경남 2》(임석재 엮음/평민사)에 실린 ‘호랑이와 할머니와 자매’를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긴 하겠지만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예전에 저그 딸이 베를 쩌넌디 조 오매더러 베 메도라 캐서 그레 조 오매가 베로 매기럴 석달열흘로 가서 매서 석달열흘로 매주넌디 딸은 묵얼 한 반트레 해서 주어서 이고 갔다.
가는디 한 고게 넘어가이께네 호랭이란 놈이 “할마이 할마이 니 이고 가넌 게 머꼬?” “우리 딸네 집이 가서 베로 매줬더이 묵얼 한 바트레이 해 주더라.” “한 문테이 주먼 안 잡어묵지.” 네라놓고 한 뭉팅이를 띠줬다. 그러이 또 한 고개 넘어 가너꺼네 또 와가가주고 “할마이 할마이 그 머꼬?”꼬 “우리 딸레 집이 가서 베 매주고 묵 한 반틍이 얻어온다.” “한 덩이 주먼 안 잡어묵지.” 또 한 덩이 줬다. 그럭저럭 한 서너너더 고개 넘어감서 다 주기 돼쁫단 말이다. 다 띠주뿌고 그레 인자 호랭이가 “할마이 할마이 그 머꼬?” “우리 딸네 집이 가서 석달열흘 베로 매주고 묵얼 한 반탱이 얻어왔듸이 저 넘어오다가 너그 동무덜 다 주고 빈 단지만 이고 온다.” 그러느꺼이 “거그 놔라 거그 앙꺼라” 그레 묵 쪼깽이 남은 거 줬다. “할마이 할마이 그 옷얼 벗으라” 이카거덩. “엇얼 벗어라 이 잡아주꾸마.” 저구리럴 벗어주이께네 꾹꾹 씹어 낭기고 초매 벗어돌아 캐서 벗어주이 꾹꾹 씹어낭게 이 잡넌다고. 또 소꼿 벗으라 캐서 벗어주이 꾹꾹 씹어 걸고 인자 머리 달비꺼정 다 벗어라 카거덩. 다 벗어줬뎅이 꾹꾹 씹어서 넝기고 이라데이 “그레 등어리 업듸디거라 여기 이 있는 거 잡자.” 업듸리너꺼네 와서 와드득 와드득 뿌서 묵으쁫거덩. 말 할마이를 다 잡아 묵으뿌고, 그러고 그 달비 가서 머리 언고 그 옷 다 입고 그 반트리 이고 갔다. 가너꺼네 그 집에 있넌 게 콩조지 팥조지거덩. 그레 “콩좃아 팥좃아 내 왔다. 문 열어라.” “우리 엄매 소리 아닌 것인데.” “아이고 아이라. 내가 하도 베럴 여러 날 매고 묵이 쉬서 그렇다.” “아무캐도 우러매 소리가 아니다 우리 엄맨가 손 보자.” 손얼 비니 푹신푹신 하거던. “아이고 우럼애 손 아닌 것네. 푸신푹신 하네.” “야야 하다 여러 날 베로 매노꺼네 터서 시껐듸마넌 그래 그렇다.” 하다 열어돌라 카싸서 열어줬다. 열어주이 그러고 또 얼라가 하나 있었거덩. 머 오도독 오도독 부수넌 소리가 나. “엄마 멋 묵노?” “아 늬 방구식(방의 한 구석에)이가 콩조까리 팥조가리 있어서 그거로 주어 묵넌다.” 행동얼 봉꺼네 달라. 그리서 둘이서 달아났어. 저어 낭개가 올라가 있었다. 호랭이는 이년덜로 찾아싸아, 없거덩.
가만히 봉꺼네 낭게 올라앉어 있거덩. “콩좃아 팥좃아 늬리온나.” “아이가 앙 갈란다 몬 가겠다” 이라거덩. “아이 저년덜 우째야 되겄노? 그럼 내가 올라갈께네 우째 올라갔노?” “뒷집에 도치 얻고 앞집에 짜구 얻고 옆에 집이 가서 참지름을 얻어각고 쪽쪽 발러각고 올라왔다.” 그러고 쫏고 발라 올라가넝꺼네 올라가다가 퉁 널쩌뿌고 올라가다가 퉁 널쩌뿌고 그레 호랭이가 네레짜싸커덩. 그레 하늘에다 축수해가고 그레 두룸박얼 네라서 콩좃이 팥좃이 달아가 올라가뿌고 그 호랭이넌 죽었답니다.
-  1971년 3월 4일 창령군 영산면 동리 윤또만(77세, 여)

구전되는 이야기를 그대로 채록해 옮겨 적은 거라 읽기가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아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에서 엄마가 부잣집에 가서 방아품을 하고 떡을 얻어오는 부분이 엄마가 시집간 딸네 집에 가서 석 달 열흘간이나 벼를 매주고는 묵을 얻어오는 차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런데 이야기가 주는 느낌은 참 달라요. 참 이상해요. 그동안 옛이야기 책을 그렇게 봤으면서도 엄마가 딸네 집에 가서 벼를 매주고 오는 이 화소에는 왜 관심이 없었을까요? 구비문학 대계도 찾아봤어요. 그런데 가만 보니 구비문학 대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여럿 있어요.

수꾸댕이가 뻘건 까닭(7집 5책-경북 성주군 월항면 / 52-54)
해와 달이 된 오누이(7집 8책-경북 상주군 사벌면 / 509~ 513)
해와 달의 유래(3집 2책-충북 청주시 모충동 / 408~411)  
해와 달의 유래(3집 4책-충북 영동군 황금면 / 782~788)
해와 달이 된 오누이(2집 6책-강원 횡성군 청일면 / 473~476)  
해와 달이 된 오누이(1집 9책-경기 용인군 이동면 / 209~212)    
해와 달이 된 자매(8집 12책-경남 울주군 강동면 / 350~352)    
수숫대가 빨갛게 된 내력(7집 10책-경북 봉화군 소천면 / 642~644)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에요. 딸네 집에 가서 벼를 매주고 오다가 엄마가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이 전해지고 있었어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들

딸네 집에 가서 벼를 매주고 오다 호랑이한테 잡아먹힌 이 이야기를 보며 예전부터 갖고 있던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대한 의문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것 같았어요. 의문은 이런 것이었어요.
첫째,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는 충분히 배가 불렀을 텐데 왜 남매가 있는 집을 찾아왔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주위에 다른 집이 있는데도 말이에요. 호랑이가 특별히 남매를 노릴만한 이유가 없다면 올 리가 없었을 거예요.
둘째, 남매가 해와 달이 됐다고 생각한다면 이전의 세계는 해와 달이 없는 깜깜한 세계였을 거예요. 하지만 이야기는 깜깜한 세계의 이야기와는 전혀 달라요. 마치 해와 달이 이미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해와 달은 진짜 해와 달이 아닌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요?
셋째, 왜 여동생이 해고, 오빠가 달일까 하는 점이었어요. 보통 달은 여자의 상징이죠.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이상하게도 바뀌어 있어요. 그럴만한 특별한 까닭이 있을까 궁금했어요.

재미있는 건 제가 이런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구전설화11. 경남 2》(임석재 엮음/평민사)에 실린 ‘호랑이와 할머니와 자매’ 이야기가 주는 또 다른 의문 때문이라는 점이에요.
저는 엄마가 왜 이미 독립을 한, 시집간 딸네 집에까지 벼를 매주러 갔을까 참 의문스러웠어요. 집에는 어린 동생들만 남겨둔 채로 말이에요. 결국 이 엄청난 일은 엄마가 시집간 딸네 집에 가지만 않았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문제라고 여겨졌어요.
흔히 ‘시집간 딸은 도둑년’이라고들 하지요.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올 때마다 필요한 걸 야금야금 가져간다고 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시집간 딸이 안쓰러워 이것저것 챙겨주기에 바쁜 엄마 때문에 나온 말이기도 할 거예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엄마가 진짜로 시집간 딸네 가서 일을 해 주고 오느라 이런 엄청난 일이 생겼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시집간 딸에게까지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 챙겨주려고 하는 건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장면일 거예요.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말이에요.
원래 시집을 가면 스스로 독립을 해야만 하지요. 하지만 많은 엄마들에게 한 번 자식은 영원한 자식이에요. 그러다 보니 아이가 커감에 따라 엄마의 손길이 덜 가야하고, 시집 장가를 가고 나면 손에서 놔야 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해요.
이미 장성한 자식을 둔 엄마들이 갓난아기 때문에 꼼짝을 못하는 엄마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해요.
아이가 좀 크면 편할 것 같지? 천만에! 아이가 크면 클수록 더 할 일이 많아. 지금이 편할 땐 줄 알아. 아이들이 대학가면 취직 걱정, 취직하면 결혼 시킬 걱정, 결혼하고 나면 잘 살까 어쩔까 싶어 또 걱정이야.
결국 이 말대로라면 엄마는 평생 아이의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모르긴 몰라도 고부간의 갈등 문제가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일 거예요. 아이를 손에서 못 놓고 늘 아이 편에서 이것저것 챙겨주다 보면 상대방에 대한 불만만 자꾸 생기고, 또 결국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니까요.
전 어린 아이들을 집안에 남겨둔 채 시집간 딸네 집에 가서 일을 해주는 어머니 모습에서 아이가 독립할 때까지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자신의 모든 걸 바쳐가며 돌봐주려 애쓰는 엄마의 모습을 발견했어요. 갖고 있던 떡은 물론, 자신의 팔다리까지도 몽땅 다 내주는 엄마의 모습 말이에요.
하지만 엄마도 사람인 이상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지요. 아무리 엄마가 원해서였다고 해도,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자식 뒷바라지에 심신마저 망가지고 나면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어느 순간!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듯 호랑이처럼 무시무시하게 변해버리기도 해요.

의문에 대한 답을 찾다

이런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지요. 어렸을 때는 모든 걸 다 해 주는 희생적인 엄마였지만, 어느 순간 호랑이처럼 변해서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엄마 말이에요. 엄마는 자신이 호랑이로 변했다는 걸 모르지만, 아이들 눈에는 엄마가 호랑이처럼 보이지요. 호랑이가 다른 집이 아니라 굳이 남매가 있는 집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호랑이가 곧 엄마이기 때문이지요.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이었어요.
호랑이로 변한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찾아오지만, 예전과는 달라진 엄마의 모습이 낯선 아이들은 자꾸 마음의 문을 닫아걸려고 하지요. 그 모습이 마치 사춘기 시절 엄마와 대립하며 방문을 닫아거는 아이들의 모습과 닮았어요.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엄마는 더욱 성질이 나서 점점 더 폭력적인 호랑이가 되어가지요.
물론 엄마가 호랑이가 됐다는 걸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 몰라요. 흔히 호랑이 같은 부모라고 할 때 그 말 속에는 ‘무서움’ 말고 ‘엄격함’이란 의미도 있으니까요. 어느 순간 폭발하는 야성의 폭력성이 아니라면 호랑이다운 엄격함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아이가 자기만의 세계로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과감하게 떠나보낼 수 있으니까요.
엄마는 시집간 딸네 집에서 뼈 빠지게 일을 해주고 돌아오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집안에 있는 아이들에겐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졌고 말이에요. 하지만 순간의 감정으로 터져버린 엄마의 변신은 엄격함보다는 폭력성을 띄고 말았지요.
당연히 아이들에겐 갑자기 변해 버린 엄마의 모습이 무섭고 낯설게 다가오지요. 엄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지요. 호랑이가 집에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할 때 의심을 하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건 바로 이 때문이에요.
하지만 엄마가 아무 때나 호랑이로 변해도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어느 정도 큰 아이한테는 호랑이 엄마가 필요하지만 갓난아기한테는 호랑이 엄마가 위험해요. 호랑이 엄마한테 무참하게 잡아먹히는 갓난아기처럼요.
호랑이와 엄마가 같은 인물인 것처럼 세 남매 역시도 같은 인물로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세 남매는 아이의 발달 단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요.
가만 살펴볼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직 엄마의 무조건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갓난아기는 호랑이 엄마한테 무참하게 잡아먹혀요. 하지만 조금 큰 아이들은 이런 엄마를 피해 자신의 세계로 도망가지요. 그건 호랑이로 변해 버린 엄마에 적응을 하고 살아가는 건 어느 정도 자기 정체성이 생길 무렵의 아이에게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은 나무 위로 피해요. 아이들을 찾아 나온 호랑이 엄마는 나무 위에 올라가려 하지만 올라갈 수가 없자 어떻게 올라갔느냐고 묻지요. (원래 엄마들은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아이들이 가면 회유를 하곤 하지요) 오빠는 참기름을 바르고 올라왔다고 해요. 하지만 오빠 말대로 참기름을 바르고 오르려다 실패하는 호랑이 엄마를 불쌍히 여긴 동생은 도끼로 찍어가며 올라오면 된다고 말해주지요.
두 아이는 호랑이 엄마를 따돌리고 호랑이 엄마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들 나름의 세계인 나무 위로 오를 수 있었지요. 그러나 동생은 애타게 아이들을 찾으며 사정을 하는 호랑이 엄마의 모습에 약해져요. 원래 어린 아이들은 엄마와 팽팽한 대립을 하다가도 한순간에 무너지곤 하잖아요. 사춘기를 지난 아이들이라면 결코 휘둘리지 않겠지만요. 결국 동생은 갓난아기와는 또 다른 발달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언젠가 제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한 기사를 보았는데, 7살 이전에는 체벌을 하면서 키우는 게 효과가 있지만 그 이후에는 효과가 없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고 했어요. 아이는 옆에서 엄마가 자기를 때리면 자기도 엄마를 때리겠다고 하네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전 오히려 어린 아이를 때리는 거에 반대한다고요. 말귀도 못 알아듣는 아이를 때리는 게 맞겠니, 아니면 말귀를 충분히 알아듣는 아이가 말로 해서 안 들을 때 때리는 게 맞겠니, 하고 물었죠. 그러자 아이도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를 때릴 수는 없잖아.’라고 하더군요.
전 이 연구 결과는 부모가 아이 교육을 효율적으로 시키고자 할 때에는 가능한 이론이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는 엄마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때려가면서 시키면 무조건 따라오지요. 하지만 어느 정도 크고 난 뒤에는 반발을 하기 때문에 효과가 없는 거고요.
하지만 전 반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는 충분히 사랑으로 감싸주면서 키워야 하지만,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을 때는 호랑이다운 엄격함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야 아이들도 언제까지나 엄마의 품속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독립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할 수 있을 테고요.
엄마를 피해 나무로 올라간 오누이는 해와 달이 되요. 아이들이 해와 달이 된다는 건 엄마의 손이 닿지 않는 자신들만의 세계로 갔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기 전에도 결코 세상은 어두워 보이지 않았어요. 그건 세상을 밝히는 해와 달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건 오누이가 진짜로 해와 달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 같은 존재가 됐다는 뜻일 거예요. 즉, 오누이는 엄마로부터 독립해 해와 달처럼 반짝이며 각자 자신의 세계를 빛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해와 달이라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좋지요.
이것이 바로 둘째 의문에 대한 해답이었어요.
마지막 세 번째 의문에 대한 해답도 여기 그 열쇠가 있어요..
처음엔 여동생이 달이 되었고, 오빠가 해가 되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해와 달의 상징과 꼭 맞아떨어지지요. 하지만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무서운 여동생은 오빠에게 바꾸자고 말하고, 오빠는 기꺼이 바꿔줍니다. 왜 해와 달의 상징과 어긋나도록 바꾼 걸까요?
그건 둘째 의문에서 밝힌 것처럼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해와 달이 진짜 해와 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 아이가 발달단계를 의미한다면, 오빠는 당연히 여동생보다 높은 발달 단계에 있어요. 그리고 보다 높은 발달 단계에서는 동생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게 가능하지요. ‘창세가’에서 미륵이 그랬던 것처럼요. ‘창세가’에서 석가는 이승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미륵을 속이지요. 미륵은 석가가 자신을 속인 걸 알면서도 이를 받아들이고 저승으로 떠나고요.
이제 그동안 갖고 있던 의문은 다 풀렸습니다.

호랑이는 왜 하필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을까?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갖게 된 의문도 풀어야 했어요. 왜 하필 호랑이는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을까 하는 거지요.
호랑이는 남매를 쫓아가다 떨어져 죽죠. 엄마란 존재는 언젠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지요. 하지만 떨어진 그곳이 수수밭이었고, 호랑이 피로 물이 들어서 붉게 변했다는 사실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왜 하필 수수밭이었을까요?
돌상에 어김없이 올라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수수팥떡입니다. 붉은 수수나 팥은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지녔지요. 수수밭을 붉게 물들인 엄마... 엄마는 아이들이 해와 달이 되고 난 뒤까지도 늘 아이들을 지켜보며 나쁜 기운을 물리쳐주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요? 결국 엄마가 자기 분에 못 이겨서 호랑이가 됐다 해도 아이들을 멀리서나마 지켜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다 같은 것 같습니다.
엄마들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것 같아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나오는 엄마처럼 시집간 딸에게까지 무조건 온몸을 다 바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에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나오는 엄마가 폭력적인 호랑이 엄마로 변한 건 엄격함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잡아먹힌 결과였지요. 그래서 갓난아기마저 잡아먹게 된 거고요.
보고 또 볼수록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