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진 원

   

  1.
  
요즘엔 오히려 좀 뜸해진 것 같지만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초까지는 제목 앞에 '생태동화'란 타이틀이 붙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200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붐처럼 일어나던 생태동화가 누그러든 듯하다. 한동안 '생태동화'를 강조하던 모습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처음엔 생태동화라는 타이틀로 출간됐던 책들도 생태동화라는 타이틀을 벗어 던지고 나오고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는 게 좋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 당시 생태동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 생태동화가 비판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태동화라는 타이틀로 나오던 책들은 대개 동물이나 식물을 주인공으로 의인화해서 사건을 끌고 나가면서 동물이나 식물의 생태를 설명하거나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생태동화는 말이 동화지 엄밀한 의미에서는 동물이나 식물의 생태를 알려주는 지식책이긴 해도 동화라는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점이 제기되곤 했다. 생태동화 가운데 많은 작품들은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단순한 기획동화로, 학습을 위한 책으로 치부되었던 건 그 까닭이다.
  생태동화 가운데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1997년, 이상권 글, 창비)와 같이 생태동화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한편으로 작품에 대한 인정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 책은 이상권이 어린이 책 작가로서 확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상권=생태동화 작가'라는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중압감 때문인지 이상권은 이후 다소 어색하면서도, 정보를 줘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지나치게 도식적인 동화를 발표한다. 《풀꽃과 친구가 되었어요》(1998년, 창비)는 식물을 소재로 한 생태동화다. 이 책의 주목적은 들풀의 효능을 알려줌으로써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들풀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온갖 종류의 들풀의 효능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보니 방학을 맞아 시골에 내려간 주인공은 하루도 빠짐없이 사고를 쳐야하는 운명이 되고 만다. 그리고 주인공이 사고를 칠 때마다 할머니나 큰어머님 등은 사고를 수습하면서 들풀의 효능을 설명해주기에 바빠진다. 정말 들풀에 대해 많은 정보가 들어있는 책이지만 동화라고 하기엔 아무래도 거북스러워지고 만다. 이후 이상권은 《똥이 어디로 갔을까?》(2000년, 창비)를 비롯해 많은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전처럼 생태동화라고 내세우진 않지만 꾸준히 생태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쓰고 있다.
  이상권과 함께 생태동화 작가로 분류되곤 하는 또 한 사람은 박윤규다. 박윤규의 작품 가운데 첫 번째 생태동화는 《버들붕어 하킴》(1998년, 현암사)이다. 이 책은 버들붕어 하킴이 사람들의 환경오염과 외래종 물고기로부터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다. 박윤규는 이 작품에 앞서 《뻐끔뻐끔 물속 친구들》(1996년, 산하)를 발표한 바 있는데, 《버들붕어 하킴》은 작가 자신이 '한국 민물고기 협회'에서 공부를 하면서 썼던《뻐끔뻐끔 물속 친구들》에 이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뻐끔뻐끔 물속 친구들》은 우리 민물에 사는 많은 민물고기에 대한 정보를 주는 지식 책이다. 그리고 《버들붕어 하킴》은 그 동안 쌓았던 민물고기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민물고기가 살아남기 어려워진 현실을 고발하기 위한 의도로 쓴 생태동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박윤규의 생태동화는 이후 곧 난관에 부딪치고 만다. 박윤규는 2000년 7월부터 2003년 1월에 이르며 발표한 다섯 권의 생태동화가 바로 그렇다. '우리 자연과 동물을 알게 하고 자연과 더 친하게 해 주는 책'이라고 밝힌 《날아라, 하늘다람쥐》, 《수평선으로 가는 꽃게》, 《비로용담과 번개오색나비》, 《은반지를 낀 후투티》, 《각지붕어가 장가간대요》(현암사)는 주인공으로 내세운 동물들을 통해 많은 종류의 숲속 동물, 바다동물, 나비, 새, 민물고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부적절한 의인화 기법으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보다는 사람의 눈으로 자연을 재단하고 만다.
  박윤규의 생태동화 이후 생태동화라는 타이틀로 나오는 책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생태동화라는 타이틀이 사라졌을 뿐 《구더기는 똥이 좋아》(2004년, 김순한 글/대교출판), 《곤충의 왕 딱정벌레》, 《낙하산을 타고 날아가는 거미》, 《여치사냥꾼 멋쟁이 조롱박벌》(2004년, 이상권 글, 작은씨앗)과 같이 비슷한 종류의 책들은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은 바뀌지 않았지만 생태동화라는 타이틀만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왜일까? 혹시 이런 현상이 그 동안 나왔던 생태동화들의 한계로 지적되곤 하던, 생태의 본래의 뜻과는 조금 거리가 먼 지식을 주기 위해서 기획 동화의 모습을 탈피하고자 그런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거북스러운 생태동화의 타이틀을 벗어던진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게다. 오히려 생태동화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작품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2.
  
사실 생태동화란 말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동화는 그냥 동화일뿐, 생태동화란 게 과연 필요한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다. 문학으로써 동화가 자기 본분에 충실하다면 자연스레 생태문제 역시 작품 속에 묻어날 수 있고, 따라서 따로 생태동화라는 건 필요치 않다는 입장이다.
  충분히 공감이 되는 말이다. 하지만 기왕 생태동화란 말이 널리 퍼져있는 마당에 기왕이면 생태동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성인문학에서는 생태문학 혹은 녹색문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린이 책에서 생태동화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건 아무래도 책임방기로 보인다.
  생태동화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먼저 '생태'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국어사전을 보면 생태란 '생물이 자연계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는 좁은 의미의 자연과학적 범주에서만 바라본 개념일 뿐이다. 실제 현대 사회에서 생태학이란 인간 상호간의 관계와 인간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서양에서부터 출발을 한 것이다. 이런 의식은 생태계의 위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1920년대 알리스터 하디가 밝혀낸 북해에 서식하는 청어의 먹이 사슬이 고래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미국 그랜드 캐니언에 있는 케이법 고지대의 사슴이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바로 사람들이 이 사슴의 천적을 없애버림으로써 사슴의 먹이 사슬을 변형했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들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이런 연구를 통해 생태계의 위기는 몇몇 천연기념물을 보호하거나 특정 지역을 자연보호 구역으로 지정해서 관리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이후 1972년에는 '성장의 한계, 인류의 현 상태에 대한 로마 클럽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이 보고서는 지금까지와 같은 성장 정책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로는 더 이상 지구가 살아갈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충격은 생태학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가져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