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경 연

 

  1. 환경 및 생태계 파괴의 인식

  생태주의는 한 마디로 지구상의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의 조화로운 공존공생을 추구하는 주의이다. 이러한 생태주의가 문학의 의식에 들어온 것은 무엇보다도 1960년대부터 서구 산업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환경운동, 녹색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환경파괴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가 결국은 인간 자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인데, 환경 파괴의 심각성에 대한 여론을 일반화시키는 데 가장 기여한 것으로는 무엇보다도 1972년 <성장의 한계. 인류의 현 상태에 대한 로마 클럽 보고서>를 꼽을 수 있다. 핵 에너지의 위험, 대지와 하천, 바다의 화학 물질 오염 문제, 지구 대기 온도의 점진적 상승으로 인한 온난화 현상,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가속화되는 사막화 현상, 천연 자원의 급격한 감소 추이, 많은 동식물과 야생 동물의 멸종 가능성, 그리고 산업 폐기물 오염 정도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 보고서는 지구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같은 해 6월 스톡홀름에서는 제1차 유엔인간환경회의가 열리고 사회적으로는 환경운동, 녹색운동이 사회 운동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는다.

  2. 환경운동 및 반핵운동과 동화

  아동청소년문학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일반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환경오염을 고발하는 이른바 환경동화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그것인데, 1971년 미국 아동청소년문학 작가 진 크레이그헤드 조지의 《누가 정말 울새를 죽였나》가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가장 깨끗한 도시임을 자랑으로 아는 가상의 도시 새들보로가 무대인데, 이 도시의 마스코트인 울새가 죽어나가자 환경에 관심이 많은 소년 토니가 그 이유를 밝혀내고 다시 깨끗한 도시 환경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미국의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발견되어 해충 퇴치약으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던 DDT의 순환 과정을 밝힘으로써 그 위험을 경고한 《침묵의 봄》(1962)의 모티프를 채택하여 동화로 썼다. 이렇게 계몽적 성격이 강한 작품은 흔히 작가의 목소리가 앞선 나머지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을 위험이 크지만, 《누가 정말 울새를 죽였나》는 작가가 독자에게 설교하거나 독자의 판단을 앞서 이끌지 않는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함으로써 환경동화의 고전이 되었다.
  생태계 파괴에 맞선 아이들의 행동을 그린 것으로는 구드룬 파우제방의 《나무 위의 아이들》(1999, 1983)
1)을 예로 들을 수 있다. 산타나네 가족은 남아메리카 원시림 가장자리에 살고 있는데, 그들이 살고 있는 땅과 숲의 주인은 숲을 태워 밭으로 개간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한다. 하지만 산타네네 아이들을 통해 숲이 없어지면 숲 속에 살던 동물들은 터전을 잃고 물도 마르고 좋은 공기도 사라질 것임을 알게 된 주인 세뇨르 리폴의 아들 움베르토는 나무 위로 올라가 숲을 태우지 못하도록 막는다. 아들의 행동 앞에서 아버지가 그토록 순식간에 경제적 동기를 포기할 수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 개발 논리를 포기하지 않고는 환경 보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구드룬 파우제방의 《핵전쟁 최후의 아이들》(1997, 1983)과 《구름》(2000, 1987)은 공포를 통한 계몽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핵의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데 정점을 이룬다. 《핵전쟁 최후의 아이들》은 핵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몇 년 동안 인류를 멸망시킬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방관하거나 무관심한, 심지어는 핵무기로 인해 평화의 균형이 유지되는 거라고 주장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셰벤보른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가운데 하나인 롤란트의 1인칭 시점에서 그려내며, 《구름》은 대체 에너지의 해결사로 여겨지던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가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야나의 눈을 통해 보여주는데, 두 작품 다 예측할 수 있는 결과와 상황 전개임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고 다층적인 상황 설정과 인물들의 내면 묘사로 긴장감 있게 읽힌다.
   위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듯이 직접적으로 환경오염이라든가 핵의 위험, 생태계 파괴 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강한 계몽의 의도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때 문학으로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앞장서서 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상상과 생각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3. 자연과 생태의식

  다른 한편, 생태주의란 무엇보다도 관계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과 자연은 상호 관계 속에서 삶의 공동체를 이루며, 만약 그러한 그물망에서 하나가 파괴될 때는 공동체 전체가 위험해진다는, 지구라는 공동체에서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살고 또 살아야 한다는 의식, 즉 생태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의식을 근거로 생태주의는 환경주의 내지 환경관리주의와 구별되기도 한다.2)   생태주의를 이렇게 넓혀 생각한다면, 그간의 인간중심주의, 기술문명우월주의를 비판적으로 지양하고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자연과의 관계를 반성하게끔 독려하는 작품들을 역시 넓은 의미에서 생태주의 동화에 포함시켜도 좋을 것이다. 이는 최근 생태문학이나 녹색문학의 논자들인 김용민이나 이남호의 ‘넓은 의미’의 생태문학개념과도 통한다.3)
   진 크레이그헤드 조지의 《나의 산에서》(1995, 1960)와 《줄리와 늑대》(2002, 1973), 베치 바이어스의 《검은 여우》(2002, 1968),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2000, 1976), 게리 폴슨의 《손도끼》(2001, 1988), 수잔 제퍼스의 《시애틀 추장》(2001, 1991), 콜린 티엘의 《티미》(2003, 1993), 론 버니의 《독수리의 눈》(2000, 1995), 팀 윈튼의 《블루백》(2000, 1998), 이자벨 아옌데의《야수의 도시》(2003, 2002) 등이 여기에 속하는 작품으로 꼽을 수 있을 터이다.
  이런 계열의 작품은 딱히 생태의식을 전면에 내걸지 않아도 자연의 존재와 가치를 감각적으로 구체화시켜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 작품에 대해 자연은 어떤 식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자연과 어울려 사는 삶은 어떤 식으로 그려지고 있는가? 또 그것들은 생태 의식의 고양이라는 면에서 어떤 가치를 전달해 주고 있는가? 와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혼자 힘으로 산에서 생활해보고자 캐츠킬 산으로 떠난 주인공 샘 그리블리의 산 속 생활을 그린 《나의 산에서》나 비행기 조종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캐나다의 숲 어딘가에 불시착해서 손도끼 하나로 생존을 시도해야 했던 브라이언의 이야기를 그린 《손도끼》는 야생의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로빈슨 크루소 류의 모험소설에 속한다. 하지만 프라이데이까지 포함하여 야생의 자연을 문명화의 대상으로 보았던 《로빈슨 크루소》와는 달리 둘 다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연이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나가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미덕을 지닌다. 스스로 택하지 않은 갑작스런 모험이었기에 심리적인 충격과도 맞서야 했던 《손도끼》에서는 이른바 문명이란 것이 인간과 자연을 얼마나 갈라놓는지를 이렇게 진술한다.

라이플 총은 브라이언과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 사이를 갈라 놓는 것 같았다. 라이플 총이 없었을 때는 숲 속 생활에 적응하고, 일부분이 되고, 이해하고, 이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라이플 총이 있다면 숲 속 생활을 두려워하거나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바보 새를 죽이기 위해 가까이 다가설 필요도 없었다. 또 바보 새를 쳐다보지 않고 옆으로 걸어가는 척할 때 바보 새가 도망가지 않는다는 걸 알 필요도 없었다.(《손도끼》, 177)

  브라이언은 야생의 자연을 체험한 후 “무슨 일이 일어나면 신중하게 살펴보고 나서 반응하는 능력”을 얻게 되고, “말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는” 사려 깊은 사람이 되며, 모든 음식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184). 자연을 체험하며 겪는 경이는 “처음 보았던 모습 그대로 바람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검은 여우의 모습에 대한 기억처럼 “숱한 시간을 뛰어넘어”(검은 여우, 7, 168) 지속될 수 있으며, 이는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작품들은 딱히 생태주의를 내걸지 않지만 이남호가 녹색문학에 대해 희망하듯이 “자연에 대한 사랑과 연민과 존경의 마음”(이남호, 34)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줄리와 늑대》는 집을 나온 에스키모 소녀 미약스(줄리)가 늑대 아마록의 도움을 받아 툰드라 평원이라는 거친 야생의 자연 속에서 살아남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아마록은 비행기를 타고 재미 삼아 사냥하는 인간의 손에 죽고 만다. 당당하고 용감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던 죄 없는 아마록의 죽음은 줄리에게 인간의 문명이란 것에 대해 환멸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환멸은 어렵사리 만난 아버지의 집에서 비행기 헬멧과 눈안경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배신감까지 더해진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할 권리는 없다. 늑대가 멸종되면, 반대로 사슴의 수가 너무 많아져 들풀을 다 먹어치울 거야. 그러면 북극쥐는 먹이가 없어 굶어 죽게 되고 북극쥐를 먹고 사는 새나 여우, 족제비도 살아갈 수 없게 돼.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알래스카는 자생력이 없는 죽음의 땅이 되고 말 거야.”(《줄리와 늑대》, 148)라며 평화롭게 사는 늑대들을 멸종시키고 알래스카를 독차지하려는 백인들의 정책을 비판하곤 했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늑대가 에스키모의 다정한 친구였던 옛날은 아쉽게도 끝나”(《줄리와 늑대》, 200) 버렸음을 통감하며 결국은 아버지의 집 쪽으로 향하는 결말은 비극적이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좋았던 과거로의 도피가 아니라 다시 한번 현재적 시점에서 현실을 반성하게 하는 리얼리티를 제공한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일구는 삶을 무엇보다도 잘 보여주는 작품은 고아가 된 다섯 살 소년 작은 나무가 체루키 인디언의 피를 받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산에서 사는 이야기를 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인 듯싶다. 매에게 잡아먹히는 메추라기를 보며 슬픈 얼굴을 짓는 손자에게 할아버지는 ‘자연의 이치’를 알려준다.

“슬퍼하지 마라, 작은 나무야. 이게 자연의 이치라는 거다. 탈콘 매는 느린 놈을 잡아갔어. 그러면 느린 놈들이 자기를 닮은 느린 새끼들을 낳지 못하거든. 또 느린 놈 알이든 빠른 놈 알이든 가리지 않고, 메추라기 알이라면 모조리 먹어치우는 땅쥐들을 주로 잡아먹는 것도 탈콘매들이란다. 말하자면 탈콘 매는 자연의 이치대로 사는 거야. 메추라기를 도와주면서 말이다.”(《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24)

  약육강식이라는 단어로 막연히 상상하던 ‘잔인한’ 자연의 법칙과는 사뭇 다르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백인 교사는 작은 나무가 사슴 두 마리의 사진을 보며 수사슴과 암사슴의 자세나 주변 풀이나 나무 모습에서 짝짓기를 하는 게 분명하다고 말하자 얼굴을 벌겋게 붉히면서 “추잡스럽다”고 고함을 지른다(《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295).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따라서 진실과도 먼, 교육 현장의 단면의 아닌가. 결국 작은 나무는 다시 할아버지에게 돌아간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화들로 가득 찬 이 이야기는 그러나 탐욕과 허위의 문명 세계에 대한 비판은 충분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대안적이라기보다는 도피적 성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미 생존의 터전이 되었기에 문명 세계의 틀을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실행하기 어려운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성격은 자연 민족인 원주민의 삶을 현대 문명과 대비시켜 보여주는 데는 성공적이지만, <줄리와 늑대>에서와는 달리 그들 내부의 내면적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림으로써 《시애틀의 추장》과 마찬가지로 야생의 삶을 신화화 내지 신비화시키는 태도하고도 통한다. 이런 식의 신화화는 아마존 오지로 야수를 찾아 탐험을 떠난 탐험대의 이야기를 그린 《야수의 도시》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은 일반문학에서도 인정받는 작가의 작품이라 기대를 했으나, 생태의식 측면은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생태주의는 오락적 요소로서만 기능하며, 원주민의 묘사 역시 과장된 신비주의로 채색되어 있고, 이른바 '하얀 신(神)'의 신화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백인 문명의 파괴적 성격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학살을 다룬 가슴 아픈 이야기 《독수리의 눈》에서도 다루어진다.
  역시 오스트레일리아를 배경으로 하여 고래의 남획 문제를 다룬 《블루백》은 보호구역을 설정하도록 관철한 이를 이른바 학문적 성취를 이룩한 아벨이 아닌 소박하게 자신의 터전을 지키던 어머니로 드러냄으로써 생태여성주의적 관점을 보여준다.

  4. 인간의 정신적 생태

  생태주의는 자연과의 관계만을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생태계의 파괴는 인간의 정신에서도 일어난다. 최근에 나온 낸시 파머의 《전갈의 아이》(2004, 2002)는 생명을 복제하기에 이른 인간의 정신적 생태계의 파괴를 경고한 작품으로도 읽힌다.
  헉슬리의 신세계부터 문학이 보는 미래 사회는 암울하기만 하다. 이 소설 역시 예외는 아니다. 복제인간 ‘클론’으로서의 마트의 처절한 존재상황과 고뇌, 클론은 아니지만 뇌에 칩이 이식되어 한 가지 단순작업에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이짓’의 존재방식, 그들을 만들고 통제하는 '진짜' 인간들과 그들에 의해 유지되는 체제를 다룸으로써 과학의 발전이 꼭 인류에게 행복을 안겨주지는 않으리라는 묵시론적인 예언들을 느끼게 한다.
  생명복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태도가 존재한다. 이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태도를 연상시키는 데, 하나는 윤리적인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태도와 하나는 치료라는 목적을 내세우며 제한적 찬성을 보내는 태도가 그것이다. 그간의 과학의 전개는 윤리적 이유가 큰 장애요소가 되지 않음을 증명한다. 복제양 돌리는 태어났고, 배아복제의 성공은 국민적 성과인양 떠받들어졌다. 과학자들은 치료라는 목적을 내세워 앞으로도 꿋꿋하게 실험을 계속할 것이다. 복제인간의 탄생은 영화나 소설 속의 일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이 소설은 그때의 일을 다룬다. 따라서 미래소설이며 SF이다.
  이 작품의 장점은 그러한 미래의 청사진에 대해 윤리적 구호를 높이 외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보여준다는 데 있다. 지금의 독자는 아무도 클론 마트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적어도 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느낄 수는 있다. 만약 나의 클론이 존재한다면 그는 나일까, 별개의 인간일까, 아님 내가 언젠가 이용할 수 있는 장기의 창고일까, 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클론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거대자본임도 읽을 수 있다. 그것도 철저한 비인간적 착취를 기반으로 한. 얼마 전 인간의 수명은 1000년이며 노화 방지 기술이 가능하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그 기술을 장악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자본과 권력을 소유한 이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본 증대와 권력유지를 위해 다른 많은 인간들은 이짓으로 전락하여 소모되고 폐기될 것이다. 이것이 이 소설이 그려주는 미래의 청사진이다.
  마지막에서 클론 마트는 자신을 존재하게 한 엘파트론이 저지른 죄과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이런 희망이라도 없으면 미래의 상은 너무 암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의 희망사항에 그칠 수도 있다. 현실은 더욱 암울할 수도 있다. 막연히 자연에의 회귀를 그리는 이들에게 생태주의적 주제가 어디까지 나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5. 맺음말

  이상에서 보았듯이 생태주의 동화는 직접적으로 환경 파괴와 생태계 파괴에서 시작해서 자연과의 교감은 물론 인간의 정신적 생태계까지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다. 이때 작품의 생태의식의 정도가 관건이 된다. 아울러 그 의식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형상화되었는가 역시 고려해야 한다. 생태주의 비평은 반드시 생태주의 동화를 대상으로 할 필요는 없다. 생태의식을 짚는 일은 어떤 동화에 대해서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1) 뒤의 연도는 원작이 발표된 해를 뜻함
 2) 환경주의 내지 환경관리주의와 생태주의의 차이점에 대해서 참고: 김성곤, 자기 중심 의식에서 생태 의식으로 - 환경을 넘어서는 예술. 출처: http://www.kcaf.or.kr/zine/artspaper2000_04/25.htm; 이필렬: 환경관리주의와 생태주의의 긴장, 계간 창작과 비평 2000년 여름[통권 108호] 
 
3) 참고: 김용민: 생태문학. 대안사회를 위한 꿈. 책세상 2003; 이남호: 녹색을 위한 문학. 민음사 1998; 김욱동: 문학 생태학을 위하여. 녹색 문학과 녹색 이론. 민음사 1998.

  + 참고문헌 +

  • 김용민, 《생태문학》, 책세상 2003
  • 김욱동, 《문학 생태학을 위하여》, 민음사 1998
  • 바이어스, 베치, 《검은 여우》, 사계절출판사 2002
  • 버니, 론,  《독수리의 눈》, 우리교육 2000
  • 아옌데, 이자벨,《야수의 도시》, 비룡소 2003
  • 윈튼, 팀, 《블루백》, 눌와 2000
  • 이남호,《녹색을 위한 문학》, 민음사 1998
  • 제퍼스, 수잔 ,《시애틀 추장》, 한마당 2001
  • 조지, 진 크레이그헤드, 《줄리와 늑대》, 대교출판 2002
  • 진 크레이그헤드 조지, 《나의 산에서》, 비룡소 1995
  • 카터, 포리스트,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아름드리미디어 2000
  • 티엘, 콜린, 《티미》, 문학과지성사 2003
  • 파머, 낸시, 《전갈의 아이》, 비룡소 2004
  • 파우제방, 구드룬, 《구름》, 일과놀이 2000
  • 파우제방, 구드룬, 《나무 위의 아이들》, 비룡소 1999
  • 파우제방, 구드룬, 《핵전쟁 최후의 아이들》, 유진 1997
  • 폴슨, 게리, 《손도끼》, 사계절출판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