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옥 선


 1.

  황선미의 몇몇 작품에서는 우리와 함께 사는 존재들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같은 존재이면서도 다른 존재들에게 핍박받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마당을 나온 암탉》과 옛이야기를 모티브로 은행나무집을 중심으로, 개발에 의해 스러져간 존재들의 이야기를 여러 생명체들의 자기 존재의식으로  풀어낸 《샘마을 몽당깨비》가 있다. 《과수원을 점령하라》에서는 배나무 과수원을 둘러싼 여러 동물들과 나무 유령들이 개발 때문에 자신들이 살아갈 삶터마저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저마다 다른 존재들을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다.
  위 세 작품의 공통점은 인간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산업화에 따른 개발과 자본주의에 당면한 문제, 산업화 때문에 벌어지는 자연계 속 존재들의 고통, 그것을 이겨내고 자신의 삶의 둥지를 트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황선미는 인간들이나 힘 있는 존재들에게 핍박당하고 있는 존재들과 인간들이 함께 사는 것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는 듯 하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사람을 저버리지 않고 사람과 동물, 식물들이 다함께 이 지구 위에서 화해하고 함께 걷는 길이 결국 세상을 지키는 일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글은 황선미가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밖에 존재들을 생태와 우주법칙 위에 어떻게 자리매김하여 그리고 있는 지를 다루는 글이 될 것이다. 이 글의 대상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샘마을 몽당깨비》(1999년/김성민 그림/창비), 《마당을 나온 암탉》(2000년/김환영 그림/사계절), 《과수원을 점령하라》(2003년/ 김환영 그림/ 사계절)세 작품을 두고 풀어나갈 것이다.

2.

  《샘마을 몽당깨비》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으로 빚어진 사람들의 고통과 물질문명 중심으로 변하는 세상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의 인연을 찾아 떠나는 주인공 몽당깨비와 버들이를 통해 개발과 물질만능으로 찌들어 산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있다. 버들을 사랑하는 몽당깨비는 그에게 기와집과 모든 생물들이 먹던 샘물까지 그 집으로 끌어내 준다. 그러나 버들은 이런 몽당깨비의 순정을 배반한다. 몽당깨비는 이 일 때문에 도깨비대왕에게 그 집 옆에 있는 은행나무 뿌리에 천 년 동안 살라는 벌을 받지만, 삼백 년 뒤에 기와집 일대를 개발하는 바람에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맞닥트린 현실은 옛날과 너무 달라진 모습 때문에 얼떨떨하기만 하다. 세상은 벌써 산업화돼 밤에도 낮처럼 밝은 불빛이 명멸하고, 개발 때문에 그 옛날 몽당깨비가 살던 샘마을은 간데없다. 작품의 주인공 몽당깨비는 오백 년 전의 인연인 버들이 때문에 은행나무에 숨어 살지만, 동네가 개발이 되는 바람에 은행나무가 옮겨가고 그곳에서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깨어나 현대문명에 맞닥트리게 된다. 몽당깨비를 배반하고 그 벌로 도깨비 대왕에게서 자손 대대로 가슴앓이병을 앓게 하는 것은 현대의 죄 없는 아름이에게 이어진다.
  작가는 몽당깨비와 버들이를 통해 인간에게 끊임없이 베푸는 자연을 상징하며, 버들이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물질만능으로 치닫는 속성을 은유한다. 그러나 작가는 몽당깨비를 통해 그동안 자연을 인간 중심으로 보던 눈길을 인간과 자연과 함께 사는 길을 찾아 나간다.  삼백 년 전 버들이는 그 후손들이 대대로 가슴앓이병을 앓는 벌을 받게 되고, 버들이가 자연에 빚진 것을 은행나무를 살리는 버들이 후손인 아름이가 보상하게 한다. 이는 자연 속의 동식물들이 팔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거룩한 영혼이 깃들어 있는 생명이란 것을 깨닫게 한다. 은행나무가 말라 죽는 대목은 바로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 하다. 은행나무는 샘마을 기와집의 개발 때문에, 구청장의 배려로 다른 곳으로 옮겨 온갖 정성을 기울이지만 샘의 기운을 받지 못하면 결국 죽고 만다는 설정은 작가의 이런 사고를 대변한다. 옛날 샘마을이었던 곳이 비록 천수동으로 이름은 바뀌지만, 그곳을 다시 되찾고 개발에서 제외시켜 은행나무 자리를 마련하는 것 또한 작가의 이런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아름이의 정성으로 은행나무의 근본 생명력이 뿌리 내릴 수 있는 곳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까닭도 바로 작가의 이런 사고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이는 결국 비로소 인간과 자연은 이 지구상에서 언제나 같은 길을 갈 때만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게다가 작가는 자연 뿐 아니라 무생물에게도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몽당깨비가 쓰레기 더미에서 만난 미미는 공장에서 만들어 판 한낱 놀잇감이다. 그러나 미미도 고장이 난 바람에 주인 아이에게 버림을 받고, 뒤에 몽당깨비를 통해 생명을 받는다. 그 뒤 미미가 다니던 장소마다 온갖 식물이 돋아나는 것은 작가의 모든 존재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는 작가의 개발에 대한 생각이다. 작가는 개발이란 자연을 훼손하고, 그 속에 함께 살던 자연물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은행나무가 샘마을 기와집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작가의 자연에 대한 이런 시각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작가는 자연을 해치는 인간을 비판하는 동시에 인간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 버들이를 통해 인간의 사악함과 황금만능주의를 드러내지만 삼백 년 뒤 그의 후손인 아름이가 자연에게 보상하는 것에서도 들여다볼 수 있다.

  작가의 자연관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작품으로 《과수원을 점령하라》가 있다. 이 작품은 전근대를 상징하는 과수원과 그 과수원을 둘러싼 여러 생명체들이 함께 하는 삶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배꽃 마을 과수원에서 사는 젊은 부부와 할머니, 고양이 호피, 여름 철새 찌르레기, 은행나무 귀신, 들쥐들이 과수원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들은 옴니버스 영화처럼 이야기 저마다가 독립성을 갖지만 공통된 흐름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모든 생명체는 하나이며 형제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것은 세 사람(아저씨, 아줌마, 할머니)이 갖고 있는 저마다 조금씩 다른 생각들이 할머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뒷부분으로 갈수록 생명공동체의 개념으로 완결된다. 아줌마가 갖고 있는 속성은 인간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물질적 가치가 중심에 있지만 아저씨의 애매모호한 태도와 샤머니즘에 뿌리를 둔 할머니의 전근대적 감수성은 독자에게 이런 점을 어렴풋이 느끼게 할 것이다.
  애완용으로 자라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조차 잊고 살았던 고양이 호피, 그런 고양이를 짓밟으며 먹이를 찾아 오라고 으르렁대는 왕쥐의 모습, 아버지 고향을 찾아왔지만 벌써 아파트 단지가 돼 먹이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찌르레기, 쥐들이 과수원으로 이사오는 과정(시멘트로 포장돼 걷기조차 힘들고 자칫 차에 깔려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은 산업화로 엉망이 돼 버린 먹이사슬과 심각한 생태계의 위기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호수에서 활기차게 황소개구리를 잡아먹는 오리, 뒤늦게나마 자기 자신을 되찾는 고양이 호피, 자기 식구들을 끝까지 보호해 과수원까지 무사히 오게 만든 발바리 쥐와 새로 태어날 생명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 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만물에 대한 대자연의 고귀한 섭리를 느낄 수 있다. 대자연의 섭리란 온갖 생명체를 낳게 하는 흙, 바람, 물, 햇빛과 그것을 모두 감싸안는다는 것과 통할 것이다. 새 생명이란 이렇듯, 그것이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온갖 것들에 대한 존중과 그것들이 곧 ‘나’라는 인식이 있을 때 생존의 최상의 조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할머니는 모든 생명체가 선 자리는 우열이 없으며 결국 하나라는 것을 그의 여러 행동에서 드러낸다. 호수로 떠난 오리의 발바닥이 아플 것이라든가, 생명을 기다리는 마음을 ‘새가 아기 영혼을 물어 올 거라’고 믿어 깃털을 유리병에 담아 매화나무 그루터기 옆에 묻는 행동 따위들은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그런 관계 속에서만이 한 뿌리로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작가의 근본 생태주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작가는 모든 생명체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고, 언뜻 다른 생명으로 보이는 것들이 결코 인간들과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들 생명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고통에 함께 마음 아파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할머니는 이렇듯 자기 필요에 따라 존재를 규정하지 않고 아무런 사심 없이 자기와 자기가 사는 과수원을 벗어나 행동하고 사고하는 자연인 그대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작가는 지금 현대가 직면하고 있는 근대와 전근대를 과수원과 과수원 바깥으로 명확히 견주어 상징하고 있다. 과수원은 모든 생명체는 같은 것이며 그것들은 인간과 똑같이 존중받고 보호해야 할 존재라는 물활론적 사고로, 과수원 바깥은 온갖 생태계가 파괴돼가고 있는 물질문명 세계로 대비된다. 결국 과수원이 내포하는 것은 이 지구상에 생명의 근원과 그것이 싹틀 때의 기억, 생명 낳은 흙이나 물, 바람, 햇빛,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의 근원을 자신이 기억하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할머니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할머니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 인간들이 끊임없이 바라보는 인간의 뿌리를 나타내고 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난용종암탉인 잎싹의 삶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찾고, 삶의 이면과 의미를 찾아가는 삶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잎싹이 자기극복의 삶을 통해 모든 생명체의 질서를 깨닫게 한다. 잎싹은 부화시킬 수 없는 알만 낳는 난용종 암탉이다.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닭장 속에서 알만 낳으며 죽을 날만 기다리던 잎싹은 결국 죽은 다른 닭들 무리 속에 끼어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늘 알을 품기를 바라는 잎싹에게 야생오리인 나그네의 알을 품게 되고 초록머리의 엄마가 된다. 이런 와중에 잎싹은 마당 식구들에게 핍박받고 차별 받으며 서서히 자신의 본모습에 눈을 뜨게 되고, 결국 족제비의 먹이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속의 대원칙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마당 식구인 수탉, 암탉, 집오리, 나그네, 흰오리, 개들을 통해 인간세상에 존재하는 존재들의 서열을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에 의해 사육되고 명령 받으며 인간세상의 법칙을 따라 산다. 다른 식구들이 오면 배타적으로 행동하며, 끝도 없는 텃세를 부린다. 이들은 자신의 근원이 자연이며, 땅인 줄을 모르고 인간의 눈으로만 세상을 본다. 그러나 잎싹은 초록머리의 알을 품으면서 사고의 폭과 깊이를 더한다.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홀가분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책임과 위험이 따른다는 것도 깨닫는다. 작가는 여기서 현실을 보는 냉철함을 잃지 않고 날 수밖에 없는 야생 청둥오리인 초록머리의 삶과 결국 족제비의 먹이로 세상에서 스러진 잎싹의 삶을 펼치고 있다.  
  여기서 마당식구들을 면밀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마당식구들은 비록 다른 자연물들과 다르게 마당 안에서 편안하게 살지만, 인간(닭장 주인 부부)들에 의해 구별되고 판단되며 이용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그들끼리 그 속에서 서로 위에 서려고 끊임없이 다투며 산다. 독자들은 그들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결국 모든 자연물들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뒷부분 초록머리가 결국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고 잎싹이 족제비의 먹이로 사라지는 일련의 과정은 총체적인 자연 속에서 존재들의 삶의 방식을 통찰하는 부분일 것이다.

3.

  지금까지 황선미의 세 작품에서 드러난 그의 자연관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황선미는 그의 작품들 속에서 인간과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의식하고, 그들의 생활방식 속에서 지금의 문명사회를 일정한 농도로 비판하고 있다(《샘마을 몽당깨비》, 《과수원을 점령하라》). 존재와 존재들의 우열 속에서, 이 세계가 문명화되면서 상대적으로 핍박받고 고통받는 존재들을 가운데 두고 그들과 인간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 듯 하다(《마당을 나온 암탉》). 작가는 그런 점을 총체적인 사회 구조와 삶의 방식에서 보지 않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을 껴안으며 서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보다는 개발로 인해 어찌할 수 없이 벌어지는 자연물들의 희생은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세상은 어쩔 수 없이 인간에 의해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런 점은 아직도 인간 본연의 천진성이 덜 훼손됐다고 믿기 때문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에 근원적인 교감이 아직은 어떤 형태로든 살아있다는 것을 믿는 작가의 낙천성에서 기인하는 듯 하다.  훼손당할 뻔 한 은행나무골(《샘마을 몽당깨비》)이 결국은 인간의 천진성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과수원(《과수원을 점령하라》)이 모든 생명체를 껴안는 장소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삶의 재생을 꿈꾸는 작가의 따듯한 눈길이 반영된 듯 하다. 그것은 세상이 인간에 의해서 훼손되고 인간에 의해서 구원될 수 있는 작가의 인간중심주의의 생태주의를 대변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것은 가장 현실적이며 현실 가능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연을 되돌리는 일은 인간이 진정으로 노력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천진한 천품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이처럼 작가 황선미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사는 세상을 끊임없이 꿈꾸며, 그 둘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현실인식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자연은 끊임없이 부침을 당했고, 그것 가운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물질문명과 개발, 산업화와 생산 지상주의, 상품 소비주의 시대에 대한 비판의 눈길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문학의 자리에서 생명, 환경, 자연, 인간을 다루는 것은 유기적 생명관에 뿌리박은 평등주의 감수성으로 다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황선미의 자연과 생명체에 대한 눈길 역시 유기적 생명관에 뿌리박은 평등주의 생각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자기반성과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그들이 부린 야만의 역사는 앞으로 작품 속에서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 사뭇 기대된다. 어쨌든 지금의 우리가 맞닥트리고 있는 세계는 서구 산업주의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가 깨지고, 온갖 사회 갈등과 긴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작가의 건강한 자연관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