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2호
<사담><역사>

근대 기걸 홍경래 장군

신명균


금년은 신미년! 일찍이 나라 정치에 불평을 품고 홑몸으로 본연이 일어나서 일대 난리를 꾸몄다가 마침내 뜻은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나 그래도 그의 이름은 조선 근대의 혁혁한 일대 혁명가로 알리어지게 된 홍경래 장군의 죽은 지 두 환갑이 돌아온 해이니 역사적으로 큰사람의 옛이야기를 두 환갑 맞이하는 오늘에 거듭해 보는 일도 또한 느낌 많은 일인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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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홍경래 장군은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던가? 장군은 지금으로부터 147년 전에 평안남도 용강군 서동이라는 촌 이름 없는 집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아주 한미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홍 장군이언만 비범한 얼굴이나 하며 궁통한 도량이나 하나 아는 사람으로 본다면 아무리 해도 촌구석에서 그대로 썩지 않고 장래는 무슨 일을 저질러도 반드시 한번 커다랗게 저지러 놓고야 말 비상한 인격인 줄은 어려서부터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홉 살 때 글방에서 훈장에게 통감 둘째 권을 배우다가 지나 진나라 시황이 한참 세력을 쓰며 천하를 호령하던 당년에 한 시골 사는 진승이라는 사람이 밭을 갈다가 장기를 멈추고 탄식하기를
『왕후와 장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으랴. 장부가 세상에 났다가 죽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죽을진데 이름이나 내어볼 것인가.』
한 구절을 읽고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읽고 읽고 또 읽어서 그 날 해를 마치고야 마는지라 훈장이 하도 이상하여 그 이유를 물은즉 장군은 사람이란 원래가 그렇게 차별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니 나도 커서 왕후나 장상이 한번 되어보겠다고 대담한 대답을 함으로 훈장은 너무도 의외의 대답에 깜짝 놀래어 장군의 입을 틀어막으며 큰일날 것이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원래가 큰 인물은 어려서부터 배짱이 다른 것도 이 말 한 마디로써 알 수 있는 일인가 합니다.
어려서부터 배포가 그와 같은 장군은 열두 살이 되자 그 고을 군수가 군내에 순행하는데 행차가 너무도 사치하고 따라다니는 이속들의 행악이 자심한지라 그것을 꼴 틀리게 본 장군은 그 버릇을 고쳐주랴 하고 여러 동무 아이들과 상의하여 보았으나 무서워서 한 놈도 응종하는 아이가 없는 지라 장군은 못난 것들이란 할 수가 없다 하고 혼자서 커다란 돌을 한아름 안고 원님 지나가는 길목에 지켜 앉았다가 지나가는 원님의 탄 사린교를 냅다 치고 도망질칠을 치니 원님의 가슴도 놀랐거니와 이속들도 가슴이 서늘하게 놀라서 사면팔방으로 그 짓 한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열두 살 먹은 홍 장군의 짓인 줄을 꿈에도 몰라서 필경은 잡지를 못하고 그저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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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와 국량이 탁월한 홍 장군은 차차 커갈수록 큰 뜻을 품고 각지 명산 대천으로 돌아다니며 이인을 만나 병법과 술수도 배우고 또는 시문도 능통하야 열일곱 살이라는 새파란 소년의 몸으로 서울을 뛰어올라와서 과거를 보고 세력 있는 재상의 집에 드나들며 벼슬운동도 하여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사람을 쓰는 것이 재주나 인격으로 보아 쓰는 것이 아니라 문벌과 지방을 구별하여 가지고 양반의 자손이면 되나 못되나 쓰여주고 상놈이면 돌아보아 주지도 않으면 그 중에도 서북지방 사람은 하향 사람이라 하여 천대를 하고 아무런 인재와 인격이 있어도 높은 벼슬을 시키지 않는지라 장군도 그 꼴을 보고 분연히 탄식하기를 나라 일이 이 지경인데 벼슬을 하면 무슨 영광이랴 하고 그때부터 장군은 단연히 이 세상을 고쳐놓아야겠다는 혁명의 큰 뜻을 품고는 벼슬길에 손을 떼고 옷을 떨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니 그때 장군의 나이는 겨우 스물한 살이라는 아주 새파란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한번 고향에 돌아오면서부터는 각 방면으로 여러 동지들을 모아 가지고 혁명의 난리를 꾸미기에 몸을 바치어 청천강 북쪽 평안북도 일대를 중심 삼아 가지고 맹렬한 활동을 개시하여 군병을 훈련한다, 군자를 모으고 군량을 준비하기 전후 6,7년 간 고심 진력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되는 신미년에 마침내 깃발을 들어 난리를 일으킨 지 불과 열흘 내외에 부근 여덟 고을을 완전히 점령하고 나쁜 관리와 행복하던 양반들을 물리치니 일시는 인심이 따라들어 위세가 크게 떨쳤으나 시세가 이롭지 못하고 관군과 의병이 굳세게 대항하여 들어옴으로 필경은 할 수 없이 정주성을 외로이 지키며 만여 명의 관군을 석 달이나 대항하여냈으되 필경은 그 이듬해 4월 19일에 관군의 탄알을 맞아 비장한 죽음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당시에는 나라의 역적이라 하여 크게 배척을 하였지만 오늘에 와서는 기걸한 혁명가로 하여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