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9호
<사화>

천도교의 시조 최수운 선생

김기전



최수운 선생이라 하면 우리 조선 사람은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요마는 외국 사람들은 벌써부터 조선에서 제일가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른은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못하시고 벌써 60여 년 전(1864)에 참혹히도 대구형장에 목을 베어 죽이움이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우리 600만 소년동무들이여. 이와 같이 온 세상 사람이 들러붙어서 조선에 제일가는 인물로 추존하는 최수운이라는 그 선생은 대체 어떻게 나서 어떠한 생각을 가졌으며 또 어떠한 큰일을 하셨든가 인제 잠깐 그 이야기를 하여 볼까요.
지금으로부터 벌써 8-90년 이전입니다.
학교도 없고 기차, 자동차, 전신, 전화, 아무 것도 없고 일본사람, 서양 사람의 내왕도 없고 우리 조선의 이천만 동포들이 다같이 어두컴컴한 꿈속에 잠기여 무엇인지를 도무지 모르고 그저 천길만길의 쇠망의 구렁텅이를 향하여 달음질 칠 때에 수운 선생께서 홀로 이것을 보시고 근심하고 한탄하여 그때의 이름으로 동학당이오, 지금 이름으로 천도교인 천만고에 없는 새로운 주의(主義)를 주창하시고 새로운 단체를 지여서 먼저 못 살게 된 우리 동무를 살리고 나아가 온 세상의 눌리움을 받는 백성들을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큰 생각과 큰일을 한 그 어른이 그때 권력을 잡은 관청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불과 41세의 연령으로 목이 베어 돌아가셨다는 것이야 너무도 놀라울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때의 무지하고 악착한 권력 계급도 그의 몸뚱이는 죽였으나 그의 정신과 그의 큰 단체 그것만은 어찌 하지를 못하여 겨우 70년이 넘지 못한 오늘에 그의 주창한 동학당-천도교는 그냥 그냥 크고 자라서 우리 조선 동포 중에 벌써 500만이나 되는 사람을 단결시켜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큰 생각을 갖고 큰일을 하신 이 수운 선생의 소년시절은 과연 어떠하였던가. 이것을 잠깐 소개하리라.
이 선생이 나신 곳은 경상북도 경주군 현곡면 가정리였습니다. 얼굴이 어떻게 잘 생기었던지 동리사람들은 그를 선동(仙童)이라 하였으며 더욱 한번 뜨면 귀신이라도 놀랄만한 그 눈은 광채가 혁혁하여 보는 사람을 놀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보고 또 생각하는 것이 통이 어린이들과 달라서 세상 사람들이 다 옳다하는 그 속에서도 끔찍하게 잘못된 점을 찾아 내이고 온 세상이 다 - 글렀다 하는 그 속에서도 분명하게 옳은 일을 찾아 내이는 것이었습니다. 여섯 살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당신의 아버지한테 나아가 이러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밖 사랑에도 계시고 안방에도 들어오시어 안과 밖에 대한 출입을 마음대로 하는데 어머니께서는 어찌하여 안에만 계시고 밖에를 나가지 못하는가.
이 질문을 받은 그의 아버지는 이 어린의 장래가 심상치 않을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선생이 열여섯 살 되던 해의 일입니다.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은 선생은 열여섯 살에 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선생은 이때부터 크게 결심한 바가 있어서 일곱 살부터 읽어보든 공자왈 맹자왈하는 구학문, 구서적을 불살라 없애고 또 집에 있던 남종여종(노예)을 해방하고 죽장 망해로 선선히 집을 떠나 조선 삼천리의 방방곡곡을 찾으면서 인심풍속의 어떠한 것을 살피고 나날이 글러 가는 조선의 정상을 진찰하다가 37세 되는 4월 5일(서기 1860년)에 위에서 말한 ‘동학당’이라는 큰 주의를 세우시고
“조선 사람아. 정신없이 잠만 자지 말고 다-같이 일어나서 한 뜻 한 마음으로 서로 힘쓰고 서로 합하여 우리 조선을 구하고 전 세계를 구하자.”
하시다가 그만 때가 이롭지 못하여 모든 일을 뒷사람인 우리에게 부탁하시고 대구 형장에 뻘건 피를 묻히어서 그 주의를 살리었습니다.
이 수운 선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쓰자면 한이 없고 또 꼭 알아야 할 것이나 여기에는 이만 합니다. -(천도교 포덕 기념날을 당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