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4호
<사화>

김응하 장군

차상찬



김응하 장군은 강원도 철원군 사람입니다. 힘이 남보다 초월하여 맨주먹 하나로 능히 큰 호랑이를 때려잡고 술을 먹으면 한꺼번에 두어 동이씩 먹되 조금도 취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키가 크기로도 유명하여 8척이 훨씬 넘고 풍채가 또한 당당하게 잘 생기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호걸남자라고 흠모하였습니다.
그는 25세에 일찍이 무과를 하였었는데 오성 부원군 이항복 씨가 한번 보고 크게 기특히 여겨 즉시 경원판관으로 천하였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다시 선천 군수 겸 조방장으로 영전이 되었습니다. 그는 도임한 뒤로 먼저 인심을 수습하고 인물 등용하는데 힘을 써서 백성 중에 효행이나 우애가 있는 사람이면 반드시 찾아보고 특별대우를 하며 재주와 용력이 있는 사람이면 반드시 불러서 일을 맡기니 일반이 모도 그에게 크게 감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하루에 천리를 가는 호마(胡馬) 한 필을 얻어서 날마다 타고 달리는데 어찌나 몸이 날쌨던지 달려가는 말 위에서 자기의 쓴 투구와 입은 갑옷 같은 것을 땅에 던지었다가 뛰어내려서 다시 그것을 집어 가지고 말에 뛰어올랐었습니다. 그는 그와 같이 날쌔고 힘이 장사였지만은 성질인즉 매우 너그럽고 온후하여 사람을 접대할 때에 극히 공순하고 사랑하며 무슨 일을 처결할 때에 매우 공평하게 하고도 물 흘러가듯 속히 하여 책상 앞에 정체되는 문서가 없으니 일반이 더욱 감복하였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인심을 감복시킨 까닭에 선천에 있은 지 불과 얼마동안에 부하 장사가 수백여 명에 달하였으니 그 중에 유명한 이는 영변의 이계방, 이명달, 철산의 정기남, 정사금, 백붕경, 임동금, 곽산의 탁송민, 성천의 황이충, 나여취, 선천의 계강 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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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광해왕 11년 기미 4월이었습니다(지금부터 311년 전입니다). 그때에 지나(중국)의 명나라에는 만주에서 새로 일어나는 청국이 큰 난리를 일으켜서 쳐들어 왔었습니다. 명나라는 많은 군사를 가지고 맞아 싸웠으나 청병에게 못 이기어 자꾸 패하게 됨으로 할 수 없이 우리 조선으로 구원병을 청하러 왔었습니다.
명나라와 조선은 자래로 서로 친밀한 나라일 뿐 아니라 그전 임진왜란 때에 많은 군사를 보내서 우리 조선을 구원하여 준 까닭에 또한 그 나라를 괄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때 우리 정부에서는 강홍립이라 하는 이로 도원수를 삼고 이 김 장군으로 좌영장을 삼아 명나라를 응원하여 청국을 치게 되었습니다. 김응하는 그때에 아주 나라 일에 죽기로 결심하고 자기의 맡은 인장을 꼭꼭 봉하여 군의 아전에게 맡기며 말하되 내가 이번에 가면 반드시 싸우다가 죽을 터이니 나라의 인장을 그대로 가져갈 수 없다 하고 또 아우 응해의 동행하려는 것을 말려 가로되 형제가 다같이 죽을 필요는 없다하고 일반 가족과 성내 백성에게 비장한 이별을 하니 보는 사람이 누구나 장군의 충의에 감읍치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때는 광해왕 11년 기미 2월 19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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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원수 강홍립은 원래에 인물이 비겁 무능하고 마음의 변천이 많은 까닭에 처음에 출병을 할 때에는 물론 당장에 청국을 쳐서 부실 듯이 당당한 기세를 뵈었지 만은 한번 국경을 넘어서 실제에 적국과 가찹게 되매 싸우기도 전에 먼저 겁부터 내어 감히 출병을 하지 못하고 그냥 주둔하여 형세만 관망하니(일설에 말하기를 그때 정부에서 옛날 의리로 인하여 명나라에 구원병을 보냈으나 내용으로는 자진하여 싸우지는 말고 형세를 보아 싸우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도원수가 그러한 행동을 하였다 합니다) 명나라에서는 하루가 민망하여 자꾸 사람을 보내 급히 응원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홍립은 도무지 들은 척 만 척 하고 혹은 군량이 아직 미비하였다더니 혹은 군사가 피곤하니 하고 차탈피탈 하였습니다.
이때입니다. 장군은 분연히 일어나서 도원수에게 청하여 가로되 우리나라의 사명을 받아가지고 온 이상에는 비록 이 몸이 분골쇄신이 될지라도 어찌 비겁한 태도를 취하리오. 내가 비록 무재무능하나 5천병을 주면 선봉으로 가서 적을 쳐서 파하겠다 하니 홍립이 할 수 없이 허락을 하였습니다.
장군은 그 5천병을 거느리고 보무가 당당하게 마가채(馬家塞)까지 이르니 강홍립은 다시 사람을 보내 전령하되 만일에 청인을 한사람이라도 함부로 죽이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목을 베인다 하니 여러 장교들이 모두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용감한 장군은 조금도 굴치 않고 군중에 영하되 장수가 출전을 하는 중에는 임금의 명도 듣지 않는 일이 있거든 황차 적국과 싸울 때에 적을 죽이지 말라는 도원수의 명령쯤이야 어찌 들을 수 있으랴 하고 군사를 더욱 독려하여 심하(深河)에까지 달려가니 청병이 벌써 곳곳이 진을 치고 있는데 그 형세가 자못 굉장하였습니다. 장군은 명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일제히 돌격하니 적이 크게 패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약 20여리 동안은 참으로 무인지경과 같이 조선 군사가 이기며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부평이란 곳에 이르러서는 명나라 군사가 청인의 촌락에 들어가서 재물과 부녀들을 겁탈하기에 마음이 팔이어서 군사의 항오가 매우 문란하게 되매 그 기회를 타서 적장 영아대가 날랜 군사 3만명을 산골에 매복 시키었다가 별안간에 시살하니 명군이 크게 참패를 당하고 따라서 조선 군사도 위험한 경우에 빠졌었습니다. 장군은 아무리 용감하게 싸우나 원래에 세력이 약한 까닭에 도원수 강홍립에게 구원을 청하였습니다. 홍립은 그 말을 듣고 구원은 고사하고 도리어 장군의 망동한 것을 책망하며 중영과 우영의 군사를 한곳에 합하여 산 위에 진을 치고 형세만 관망할 뿐이었습니다. 장군은 크게 노하여 이에 부하병과 같이 죽기로 맹서하고 포군과 활량을 앞잡이로 하여 북을 치며 청병의 대본영을 습격하니 적군의 죽는 자가 심히 많아서 일시에 송장이 산더미 같이 쌓이고 피가 내를 이르게 흘렀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시기라 할지 귀신의 작희라 할지 별안간에 북풍이 몹시 불며 모래와 돌이 공중으로 날아와서 우리의 군사들이 눈을 뜰 수가 없게 되고 탄알과 화살이 우리 편으로 도로 날아오니 적이 그 기회를 타서 우리 군사를 마저 치매 군중이 요란하고 적과 싸워서 죽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습니다. 장군은 대세가 이미 틀린 것을 알고 큰 버드나무에 의지하여 최후까지 맹렬하게 활을 쏘니 한 화살에 적이 수십 인씩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때에 우리 군사는 전부 몰살을 하다시피 하고 홀로 장군의 통인 철현이 살아 있어서 화살 300개를 장군에게 전하여주니 장군은 그 살을 가지고 싸우다가 그것이 또한 다하매 할 수 없이 칼을 빼어들고 용감히 싸우니 적의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러나 장군도 또한 적에게 수십 창을 맞고 최후에 기운이 핍진하여 버드나무에 의지하여 선 채로 죽으니 때는 기미년 4월초4일이었습니다.
장군은 죽은 뒤에도 손에 칼자루를 그대로 잡고 있고 노한 눈을 그대로 부릅뜨고 있었으니 적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적장 영아대는 장군의 죽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숨을 돌리며 가로되
“내가 가는 곳마다 횡핵을 하였으나 이 조선의 군사와 같이 용감한 군사는 첨 보았다. 만일에 산상의 군사(강홍립의 군사)로 힘을 합하여 우리를 앞뒤로 쳤으면 아주 어육이 될 뻔하였다.”
하고 그 뒤에 청인들은 장군의 돌아간 버드나무 밑을 지나가면 반드시 경의를 표하며 유하장군(柳下將軍)이라는 새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는 장군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요동백(遼東伯)의 증직(贈職)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