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2호
<사화>

이괄란 이야기

차상찬



이괄이는 꽹괄이요
 장만이는 볼만이라
수야수야 무슨수야
 공주읍내 쌍수라네
고개고개 넘지마라
 안장고개 넘지마라
여주이천 이찰밥은
 배가 불러 터진다네


-이괄은 李适-
-장만은 張晩-

-공주읍내 쌍수산성-

-안장고개는 鞍峴-
-여주는 여주-
-이천은 이천-


이 노래는 지금부터 306년 전에 일어난 이괄의 난리 때에 그 난리가 일어날 조짐으로 생겨난 노래올시다. 그것은 마치 신년해 동학난리가 일어날 때에 생겨난 ‘파랑새’노래와 비슷한 노래올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이괄이란 어떠한 사람이고 그 난리는 어찌하여 일어난 것인지 아십니까. 원래에 이괄이는 가문이 상당하여 그의 할아버지 이택이라 하는 이는 명종대왕 때에 참판 벼슬까지 하고 그의 가까운 조상 이륙이라 하는 이도 문장과 명망이 갸륵하여 세조대왕 때에 대사헌이란 벼슬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힘이 천하에 장사이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말위에 누워서 몇 십리씩을 달려가며 공중으로 날아가는 새를 쏘아 백발백중하는 재주가 있었고 글과 글씨가 또한 능하여 문장명필을 겸하였습니다. 키는 비록 작으나 담력이 크고 눈이 샛별같이 반짝이여 삼각수염을 한번 거사리고 노할 때에는 마치 성낸 범과 같이 무서워서 누구나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일찍이 무과벼슬을 하여 임진왜란 때에도 상당한 공을 이루어 광해왕이라하는 임금은 여러 가지의 정사를 잘못하여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의 원망이 많게 되니 김류, 이귀, 장유 등 여러 문신들이 인조대왕을 모셔다가 새로 임금을 삼고 광해왕을 쫓아내려고 여러 해를 두고 남모르게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문신이기 때문에 아무리 꾀를 내어도 어찌하지 못하고 최후에 이괄이와 의논하여 그의 꾀와 그의 무력으로 광해왕을 쫓아내고 인조대왕을 바쳐드려 이른바 반정의 혁명을 성공하였습니다. 그때의 공으로 말하면 누가 보던지 이 이괄이가 물론 일등공신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와 정반대로 그를 이등공신 제2인으로 하여 한성판윤(지금 경성부윤의 차석)이란 낮은 벼슬을 시키고 도감대장 이수일은 큰 공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등공신 제1인으로 병조판서(지금 무대신(務大臣)를 삼아 이괄을 감독하게 하며 기타 이류, 이귀 같은 무리들은 모두 이등공신으로 정부의 대관 자리를 모조리 차지하게 되니 이괄이 어찌 노염과 불평이 없겠습니까. 그런 중에 그 뒤 인조대왕이 임금 된 축하연을 할 때에 또한 이괄을 여러 사람의 말석에 앉히고 그 뒤에는 이괄을 평안병사로 그 직을 바꾸어 멀리 영변 골로 옮기게 하니 그것은 물론 그때 정부대신들이 이괄을 시기질투하고 무서워하는 까닭에 귀양 보내는 격으로 멀리 보낸 것입니다.
그때에 이괄의 분한 생각대로 한다면 당장이라도 난리를 일으키어 인조대왕을 마저 드러내고 김류일 파의 대관을 한칼에 죽이고 싶었지만은 때가 아직 때인 까닭에 어찌하지 못하고 억지로 분한 것을 꿀꺽꿀꺽 참으며 영변으로 갔습니다. 떠날 때부터 반란의 큰 뜻을 둔 그는 임소(任所)에 가는 그날부터 각지로 돌아다니며 인심을 수습하고 부하 왜병으로 무기를 제조하게 하고 도안의 장정을 모집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교련을 하니 불과 일년이 못되어 군사가 수만 명에 달하고 이괄의 명망이 평안일도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러자 인조 2년 갑자정월이 되였습니다. 이괄의 부하 사람 중에 문회와 이우권의 무리가 이괄에게 죄를 짓고 몰래 서울로 도망하여 청부에 변을 고하여 가로되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이 반역을 꾀하되 기자흔, 이시언, 한녀길 등과 내통을 하여 광해왕을 다시 임금을 삼고 지금 정부의 대신들을 모조리 죽이려한다…… 하니 조정이 크게 놀라 기자흔 등 4천여 명을 즉시 옥에 가두고 또 이괄의 아들 이태와 한명련의 아들 한윤 형제를 다 잡아 올리라하고 한편으로 금부도사를(금부도사는 지금의 재판소검사와 같습니다)영변에 보내어 이괄을 잡게 하였습니다. 그때에 이괄이는 영변에 있다가 그 급보를 듣고 즉시 영문을 단단히 닫아 아무도 출입을 못하게 하고 심복의 부하들과 서로의 논하여 가로되 일이 이와 같이 급하게 되였으니 가만히 앉았다가 죽는 이보다는 차라리 먼저 금부도사를 죽이고 난리를 일으키는 것이 당당한 사나이다운 일이라 하고 즉시 군사를 호령하여 한곳에 모아놓고 장대에 높이 올라 칼을 빼어들고 외치되 누구나 감히 나의 명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을 시행하리라하고 그 자리에서 어명으로 간도사를 삼아다가 한칼로 목을 베이니 전군이 크게 놀라 누구나 꿈쩍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괄은 당일로 도안에다 명을 내리며 “지금 서울에 큰 변이 있어서 그것을 구원하러간다” 하고 수하의 날쌘 군사를 뽑아 대를 짜니 정병(精兵)이 2만여명이오 항복한 왜병의 조총대가 130여명이요 기타 모든 군사를 합하여 3만여 명이었습니다. 이괄은 또 근읍의 여러 군수와 관찰사 등에게 명을 전하되 나라에 큰 변이 있으니 모두 군사를 데리고 오라하고 또 도원수 장만에게는 “지금 그것을 물리치려고 군사를 동하였다.” 하고 그 날로 영변 성을 떠나 서울로 향하니 때는 바로 인조 2년 갑자 정월 22일이였습니다.
이괄은 이와 같이 대병을 이끌고 풍우같이 몰아서 서울로 닥쳐오니 중도에서 감히 막을 자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과 10여일간에 서울까지 당도하니 그때 인조대왕은 뜻밖에 변을 당하매 어찌할 수가 없어서 여러 대신들과 같이 공주 쌍수산성으로 피난을 가고 이괄은 서울을 완전히 점령하여 경복궁에 진을 치고 흥안군을 마저 새로 임금을 삼으며 옥문을 열고 모든 죄인을 내놓고 어려운 사람을 구휼하며 술과 고기를 풍부하게 장만하여 여러 군사를 먹이니 일반이 크게 기뻐하여 이괄 장군의 만세를 부르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아니 되어 그는 그만 관군에게 다시 실패를 하게 되였습니다. 그때 관군 중에 유명한 장수는 장만과 명충신이올시다. 장만은 원래에 도원수로 이괄과 같이 평안도에 가서 이괄은 영변을 지키고 자만은 평양을 지키고 있었으나 병력이 전혀 이괄의 수중에 있었음으로 이괄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는 꿈쩍을 못하고 동정만 살피고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위의 노래에 이른바 장만이는 불만이란 그 말입니다. 장만은 이와 같이 처음에는 감히 어쩌지 못하고 있다가 정충신의 계책을 듣고서 곧 관군을 데리고 와서 밤중에 서울의 서편 산인 기르마재(鞍峴)를 점령하고 일괄과 싸움을 벌이니 이괄은 그것을 우습게 여기고 2월 11일 아침에 조반도 먹지 않고 관군을 쫓아서 서문 밖 기르마재 밑에다 진을 치고 믿고 싸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관군이 패하였으나 운수라 할지 우연한 일이라 할지 뜻밖에 서풍이 동으로 쏠려 불어서 이괄 군의 화살과 총알은 쏘는 대로 도로 바람을 따라서 산 밑으로 떨어지고 관군의 화살과 총알은 바람과 같이 이괄의 군중으로 비 쏟아지듯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관군은 그 바람을 이용하여 또 재(灰)와 모래 같은 것을 자꾸 던지니 이괄의 군사가 모두 눈을 뜨지 못하고 억지로 싸우다가 이괄의 아장(牙將) 이양이 불행히 활에 맞아 죽으니 전군이 모두 놀라서 피해 달아나고 관군은 이틈을 타서 추격을 하니 이괄은 할 수 없이 부하병 몇 사람만 데리고 광희문으로 뛰어 나가서 이천까지 가다가 묵방리란 동네에서 자기부하사람 기익흔과 이수백에게 부자가 다 가련히 죽었습니다. 위에 노래에 있는 이괄이는 꽹괄이란 말과 여주이천 이찰밥에 배 터진단 말이 여기에서 꼭 맞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