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3호
<전기>

조선의 지도와 고산자
- 피땀으로 조선 지도를 처음 만드신 고산자 김정호 선생 이야기
- 역사상 지리상 눈물나게 감격할 우리들의 자랑


신영철


여러분! 이 이야기는 벌써 이야기로 들어서 아시는 분도 있고 글로 읽어서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나는 이 거룩한 눈물이 흐르도록 감격할 이 고산자 선생의 이야기를 몇 번이라도 거듭거듭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오래된 일이라면 오래나 되어서 알 수가 없고, 예전 일이라면 예전 일이나 되어서 상고할 수가 없다 하지 바로 단 백년이 될락말락한…… 아니 8-90된 노인이 지금까지 살아 계시다면 그의 얼굴을 본 이도 있을 것이요, 그의 일을 역력히 아는 이도 있으련만 때를 만나지 못한 우리 고산자 선생의 일이라 위대한 공로를 이 땅에 끼치고 가셨건만 그때에는 눈을 거들떠보는 사람이란 하나도 없었고 그의 공로 대신에는 도리어 죽임이라는 악형이 있었을 뿐이오, 그가 죽은 뒤에는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조선은 그이를 푸대접하였고 그렇게 조선 사람은 그이에게 매몰스러웠습니다.
여러분! 고산자라는 별호를 아는 이가 단 몇 사람이 못 되지만 그래도 우리 조선 사람에게 알려지기는 불과 몇 해 전일이요, 더구나 김정호라는 성명이나마 알게 되기는 아주 새로운 근래일 입니다. 그러니 그이 내력이야 더구나 아는 이가 있겠습니까. 어느 해, 어느 날, 무슨 시에 난 줄도 모르고, 뉘 집 자손인지도 모르고, 어느 고을 어느 동리인지도 모르지만 다만 황해도 출생이라는 것 하나만이 세상에 전하야 있습니다. 선생이 만일 귀족의 집에 태어나셔서 벼슬을 하고 노론소론하며 남인북인하고 서로 다투어 보았으면 이렇게까지 내력 모르는 사람은 되지 아니 하였을 것이요, 양반의 집 자제 같았으면 이렇게까지 모르는 사람은 아니 되었을 것이로되 선생은 원래가 아주 한미한 상놈의 집 자식이요, 선생의 한 일이 워낙 그 시대에 있어서는 한 미친놈의 짓으로 밖에 더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만 죄 없는 죽음을 당하고 이름조차 파묻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고산자 선생이 무슨 노릇을 하였느냐고요? 아시는 이는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이는 퍽이나 궁금증이 나시겠습니다.
여러분! 조선은 사천년 역사를 가졌다고 자랑하고 조선은 삼천리금수강산을 가졌다고 떠들고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내세우지만 특별히 이조시대에 와서 밤낮 당파싸움이나 하고 헛글 헛 예식이나 숭상하였지 하나도 실지 있는 짓이라고는 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 임진난리도 무참히 당하고 병자난리도 참혹히 당한 것입니다. 조정에는 재상이라는 이들이 세력 다툼이나 하고 민간에서는 공자왈 맹자왈이나 읽으며 양반 다툼이나 하고 있는 판이었습니다.
양반으로 태어나지 못한 고산자의 집, 아니라 그 부모는 일평생 한이 아들로 글을 읽혀 과거를 뵈어 양반노릇 한번 해 보았으면 하는 욕심이었지만 고산자 선생은 어려서부터 뜻이 딴 곳에 있었습니다. 부모가 시키는 글공부, 선생이 시키는 글공부보다도 항상 반대되는 방면에 딴청을 부렸습니다. 공자왈을 찾아야할 터인데 동리 앞산을 바라보고는 저 산맥이 어디서 왔을까 하고 선생에게 물어보고 강남풍월한다년(江南風月閑多年)을 소리 높여 읊어야 할 것인데 산수 그린 병풍을 쳐다보고는 조선 땅덩이도 저렇게 그림으로 그려 보았으면 하는 딴 생각을 두었습니다.
선생은 한살 더 먹으면 더 먹는 만큼 키가 한 치 자라면 자라는 만큼 그 생각이 자꾸 커가고 더 뜨거워왔습니다. 그래 이리궁리 저리궁리 하다가 어떻게 해서 그 고을 읍도라는 것이 선생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날뛸 듯이 기뻐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 고을에 돌아다니며 실지와 대어 보았지만 하나도 맞는 것이 없는 헛지도였습니다. 서울에는 반드시 정확한 지도가 있으려니 하고 쫓아 올라와서 서대문 밖 약현이라는 곳에 머무르면서 이곳으로 청을 넣고 저곳으로 청을 넣고 해서 얼마 후에야 어느 대관의 주선으로 대궐 안 - 규장각은 그때 모든 서적을 맡은 관청입니다 - 에 있는 조선 팔도지도를 한 벌 얻어 가지고 우선 자기 시골로 내려가서 또 다시 맞추어 보았으나 역시 하나도 맞는 곳이 없는지라 선생은 여기서 단연히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자기 일생을 조선지도 만들기에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러고서야 나라를 어떻게 지켜가며 정치를 무엇으로 한단 말이냐. 지금까지 선비들은 헛짓을 하여 왔다. 제 나라 지도 하나를 똑똑히 못 만들어 놓고 공맹지도니 동방예의지국이니 하고 밤낮 떠들으면 무슨 소용이냐?”
선생은 지금까지 배우던 글공부를 모두 집어치우고 가난한 살림이나마 다 떨어 엎고 마누라 한 분, 따님 한 분을 데리고 그야말로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천리 길을 머다 아니 하고 걷고 걸어 서울 서대문 밖에 외로이 와서 오막살이 한간 집에서 식구가 몸을 붙여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고산자 선생은 서울을 중심 삼아 가지고 조선 지도를 만들기에 착수하였습니다. 나라의 힘도 빌지 않고, 관청의 힘도 빌지 않고, 부자의 힘도 빌지 않고, 학자의 힘도 빌지 않고, 양반의 힘도 빌지 않고, 오직 자기의 눈, 자기의 발, 자기의 손으로 혼자서 다니며 보고 보아서는 그리고 그려서는 새기고, 새겨서는 박히고 하야 전후 10년 20년 30년 자세히 햇수도 모르지만 어쨌든 장구한 시일을 허비하야 만들어 내인 대동여지도가 그의 일생 사업이었습니다. 70년 전 그 시절에 기계 하나 없이 눈으로 보아 손으로 그린 것이건만 강 하나, 산 하나, 동리 하나 빼어 논 것 없고 방향, 위치, 넓은 것, 좁은 것, 길고 짧은 것이 틀리지 않게 심지어 멀고 가까운 리 수까지 일일이 적어서 스물두 첩 열 평 이상 되는 대지도를 만들어내어 전고에는 그만 두고 오늘 같이 문명한 기계가 발달되었다는 세상에 앉아서도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고 칭찬치 않는 이가 없으며 일로전쟁이라는 큰 싸움에도 일본이 이기게 된 것은 이 지도의 힘을 입은 것이 많았고 연전 조선총독부에서 4천명의 기수와 30만원의 돈과 그리고도 6년 동안이라는 세월을 허비하야 만든 토지조사국의 측량도 이 지도를 근거 삼아 가지고 쉽게 성공하였다니 고산자 선생 한 사람의 혼자 힘으로 만든 이 지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며 선생이 조선에 끼친 공로가 얼마나 영구할 것입니까. 그 일을 생각한다면 눈물이 제절로 흐르게 감격한 생각이 납니다마는 슬프게도 선생의 보수는 오직 죽임, 그것뿐이었습니다.
선생이 10년 20년 30년이나 혼자서 피와 땀을 흘리어 박인 지도가 무엇보다도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국경방비 같은 데 더욱 힘을 써서 자상히 만들었기 때문에 병인년 양요 난리에도 이 지도가 우리 조선 장수에게 아주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그래 그때 정권을 잡은 대원군에게 그것이 들어가자
“요망스럽게 이런 것을 만들어서 외국 놈과 비밀을 통할랴고!”
하고는 60평생에 그것 하나를 만드느라고 뼈만 남은 고산자 김정호 선생과 과년하도록 시집도 못가고 아버지 일을 도와드린 그의 따님은 이 지도 만든 것이 죄가 되야 대원군의 손택이에 잡히어 옥중에서 원통히 죽은 외로운 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와 따님이 번갈아가며 손칼질을 하야 새긴 나무때기 지도판은 무참히도 부엌 아궁이 모깃불 감으로 거의 다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오직 한 조각 두 조각 고고학자들이 보배로 감추어 둔 것밖에 세상에 남은 것이 없고 다행히 선생이 평생에 친한 친구에게 나누어주었던 지도 몇 벌이 어떻게 전하야 내려와서 그나마 선생의 공로가 아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의 사업이라는 것이 대개는 이렇다 하거니와 그의 말로의 비참함이 또한 고산자와 같이 참혹함이 또한 적을 것이외다. 길고 긴 이야기는 여기서 다 할 수가 없거니와 다음 호에는 선생이 이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 얼마나 고생하셨던가 그 경과 이야기나 한번만 더 계속하고 끝을 막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