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3호
<역사상 가장 찬란하고 통쾌한 조선 3대 전승 자랑>

수나라의 백만 대병을 일거에 전멸시킨 살수대첩
- 문덕 장군의 살수대승(천하의 용장 을지문덕 장군 이야기)


차상찬


옛날 옛적에 우리 조선과 조선 사람은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라 하는 세 나라로 갈리어 마치 솥발 모양으로 서로 마주 서서있었습니다. 그 중에도 고구려라는 나라는 퍽도 강성하고 땅이 넓어서 오늘 중국의 남북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 부근까지 굉장히 크게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매우 용맹스럽고 활발한데 겸하야 활도 잘 쏘고 말도 잘 타서 몰론 어느 나라와 싸움을 하던지 한번도 패해본 적은 없고 항상 승전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러 번 승전 한 중에도 가장 크고 자랑할만한 승전은 우리나라 역사상에 유명한 살수(살수는 지금 평안남도 안주의 청천입니다) 전쟁 때의 큰 승전이올시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1313년 전-바로 고구려 영양왕 23년이었습니다. 그때에 중국에는 수나라라 하는 큰 강국이 있었는데 그 나라의 황제 양광은 아주 유명하게도 사납고 호걸스러운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부친 되는 수문제가 그전에 여러 번 고구려와 싸우다가 패한 것을 크게 수치로 생각하고 또 고구려를 그대로 두면 자기 나라 사람이 하루라도 안심하고 살수가 없다 하야 전국에다 동원령을 놓고 군사 113만3800명을 발하야 일컫되 200만명이라 하고 또 군량 200여만 석을 수운하니 인부가 역시 100여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수양제는 친히 그 많은 군사를 검열하고 단을 나누되 각 단에 대장과 아장 한 사람씩을 두고 기병 40대와 보병 80대를 거느리게 하고 아홉 길로 나누어 고구려를 쳐서 들어오니 깃발이 960여리를 뻗치고 북소리가 천여 리를 연하야 들리게 되었으며 그것도 부족하야 유명한 수군 대장 래호아는 강회의 용맹한 수군을 거느리고 수로로 침범하고 공부상서(벼슬이름) 우문개와 소부감 하조는 요수에 큰 다리를 놓고 요동성을 에워 치며 대장군 우문술과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부여 악랑 2도로 나와서 여러 군사가 압록강 서편에 와서 집중하니 그 기세가 참으로 강성하야 고구려의 산하가 다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에 수양제는 불과 며칠 동안에 고구려를 무찌르고 땅이란 땅은 있는 대로 점령할 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고구려는 원래 군사가 강하고 또 유명한 대장 을지문덕 장군이 대신으로 있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었습니다. 이 을지문덕이라 하는 양반은 사람이 퍽 용맹스럽고도 침착하며 지혜가 많은 중에 글도 잘 하였습니다. 고구려 백성들은 그를 친부모와 같이 신망하고 고구려의 임금은 그를 자기 나라의 대들보로 여기었습니다. 그 난리가 나기 전에도 영양왕은 그를 물론 퍽 신용하였지 만은 그 난리를 당하여서는 더욱 그를 신임하야 적군의 방비할 일을 전부 맡기었습니다.
그때에 을지문덕 장군은 무엇보다도 먼저 적군의 내용을 탐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대담스럽게 압록강을 건너 적진에 가서 거짓말로 항복을 하고 있으면서 자세히 그 내용을 다 탐지하였습니다.
그의 신기한 꾀는 누구나 다 알지 못하고 다만 수양제 한 사람이 의심하고서 대장 우중문에게 밀지를 내려서 그를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을지문덕 장군은 좋은 말로 우중문을 잘 꾀고 달래서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적진을 떠난 지 얼마 아니 되어 우중문은 자기의 속은 것을 깨닫고 크게 후회하야 그를 다시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많은 문덕장군은 한번 호랑이 굴혈을 벗어난 다음에야 다시 갈 리가 만무입니다. 절대로 적장의 말을 듣지 않고 태연히 압록강을 건너오니 적장이 크게 두려워 하야 곧 정병으로 문덕장군을 쫓아왔습니다.
문덕장군은 수나라 군사의 양식이 부족하야 모두 주린 빛이 있는 것을 보고 더욱 피곤하게 하려고 조금씩 싸우다가 문득 달아나서 하루 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서 일곱 번을 다 거짓 패하니 적장이 거듭 이기는 것을 믿고 자꾸 쫓아서 동으로 살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문덕장군은 다시 적장을 달래기 위하야 글 한 수를 지어서 적장에게 주었으니 그 글의 뜻을 말하면 ‘신통한 계책은 연문을 다 알고 기묘한 꾀는 지리까지 통하였다. 싸움을 이기고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 줄을 알거든 그만 두기를 바라노라’ 라는 의미이니 우리 조선에서 한문으로 오언시를 짓기는 이 문덕장군이 처음이올시다. 지금에 있어서 그때의 생각을 하더라도 문덕장군이 그 얼마나 수나라 장수를 아이와 같이 보고 마음대로 놀린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적장중문은 답서로 또 항복하기를 권하매 문덕장군은 다시 사신을 보내서 거짓으로 항복하니 우중문과 우문술은 자기의 군사가 퍽도 피곤하고 또 고구려의 평양성이 매우 견고하야 도저히 함락하기 어려운 줄을 알고 곧 군사를 돌려서 퇴군하려고 하였습니다.
문덕장군은 그때를 타서 날랜 장수와 용맹한 군사를 뽑아서 사면으로 에워 치며 쫓아가다가 살수에 이르러서는 수군의 반쯤 건너는 기회를 타 크게 습격하니 수군의 죽은 시체가 산 같이 쌓여서 강물이 잘 흘러가지 못하고 그 맑고도 푸른 물결이 일시에 피바다로 화하야 말만 하야도 무시무시하고 온몸에 소름이 끼칠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싸움에 수군의 후위장군으로 유명한 장수 신세웅도 아주 무참히 죽어서 청천강 주린 고기의 밥이 되고 또 래호아 장군도 우리 고구려 군사에게 붙잡힐 뻔하다가 억지로 도망하야 겨우 생명을 보존하였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난 남은 군사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며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하루 밤 하루 낮 동안에 450리나 되는 먼 압록강까지 쫓겨 갔습니다.
그때는 더구나 불같이 뜨겁고 찌는 7월인 까닭에 말과 사람이 더위에 죽은 자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수군이 떠날 때에는 근 200만이나 되던 것이 요동까지 이르는 동안에 고구려 군사에게 많이 죽고 100만5천이 되더니 이 살수 한번 싸움에는 그 얼마나 무척 죽었던지 본국으로 살아 들어간 것이 겨우 2천100명뿐이었습니다. 참 굉장히도 큰 싸움이요. 엄청나게도 많이 죽었습니다. 그리하야 수나라는 이 싸움에 전패한 결과로 아주 국력이 쇠패하고 내란이 일어나서 당시에 진시황과 같이 치던 유명한 호걸황제 양광이도 그 신하에게 죽고 따라서 수나라도 아주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야 중국 사람으로 여간 학식이 있는 사람치고는 지금까지도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조선 사람보다 더 잘 알며 또 그때 당시에는 중국 아이들이 이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울지 못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