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3호
<조선 전승 3대 자랑>

양만춘 장군의 안시대승

- 적은 군병으로 30만의 당병을 격퇴하고 당 태종의 눈을 쏘아 쫓은
안시대첩 용감무차의 양만춘 장군 이야기


조규수


조선 역사 중에 제일 유쾌하고 신나는 폐이지,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중국 수나라의 많은 병사를 무찔러 쫓은 이야기를 여러분은 이전 페이지에서 읽으셨으니까 다 아실 일이올시다만
그때 그 200만 명이라고 하는 큰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살수 싸움에 을지문덕 장군에게 패하야 간신히 간신히 2천여 명의 나머지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도망하야 들어간 수나라 임금 수양제가 백성들의 원망은 돌보지 않고 계집질과 음탕한 장난만 여전히 하매 그때에 벼슬하는 이연의 아들 세민이 영특한 인물이라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군사를 일으키어 수양제를 무찔러 죽이고 자기가 스스로 중국의 임금이라 자처하야 내뿜는 기세로 군사를 몰아서 서북으로 토반들의 겨레를 무찌르고 중국 원통을 차지하야 당나라의 태종 황제가 되니 그 위엄이 천하를 흔들고 그 기세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동쪽으로 조선의 고구려가 있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고구려는 그때 지금의 남북 만주 큰 벌판과 아라사 지역까지 차지하고 백성들이 어찌 강하던지 감히 가까이 올 수 없을 뿐 아니라 수양제의 아버지 적부터 정벌하러 갔다가는 패하고 쫓겨 오고 하다가 수양제 때에는 을지문덕에게 형적도 없이 아주 패망하야 온지라.
자기 나라 백성이 임금보다도 더 고구려사람을 무서워하고 어린아이까지라도 ‘커수원’ (고구려 장수라는 말)이라 하면 울음을 그치는 등 그렇게 겁내는 때였습니다.
그래 당 태종 이세민이 항상 마음에 그것을 앙앙히 알고 있어 어느 때던지 고구려를 무찔러 후환을 없이하고 자기와 자기 나라의 위엄을 떨치리라 하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 태종 이세민이 원래 영특한 인물이라 이 싸움 저 싸움에 힘을 얻고 기세를 길러 가는 곳에 거치는 것이 없고 닿는 곳에 물리치지 못함이 없어 중국의 그 큰 덩어리가 모두 그 앞에 굴복하야 호령을 쫓는지라 하늘을 찌를 기세로 동편을 흘기며 ‘이제야 그 까짓 고구려를 못 치랴’ 하고 고구려를 무찌르려 하니 그럴 때마다 신하 위증이 간하야 ‘고구려는 비할 데 없는 강한 나라이라 용맹한 장수가 많고 또 백성이 다 충용이 대단하야 치다가는 반드시 패만 보고 올 것이오니 아직 더 시기를 기다리소서’ 하고 말리고 말리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증이는 죽고 그 후로 당나라 형세가 점점 더 커진지라 태종이 기세가 충천하야 ‘이제는 고구려도 힘이 쇠하였을 것이니 내가 한숨에 무찌르지 못할 것이 무엇이랴. 수나라 때에 네 번이나 나가서다 패하고 들어왔으니 중국의 자제들을 위하야 내가 그 원수를 갚겠노라’ 하고 고구려 정벌을 명령하매 호령이 떨어지는 즉시에 날랜 군사 10만3천명이 4-5천리 밖에 있는 고구려를 향하야 진군하니 때는 지금으로부터 꼭 1281년 전이었습니다.
당나라 서울 즉, 지금 협서성 서안부 함양현으로부터 출발하야 하락의 거듭한 물을 건너며 유소의 지리한 길을 달리어(이세적 장량 등 명장으로 지휘하야) 1대는 등래에서 발해를 건너 백암성 아래에 내리게 하고 1대는 육지로 늠하를 건너 유관(중국 산해관)을 나와서 고구려의 서울인 평양을 가르치며 고구려 전경을 쓸어버리려 덤비니 천하의 정병 이세민의 10만3천은 요동의 평야를 휩쓸며 덤볐습니다.
중국 천하의 모든 기세가 오르지 고구려로 밀려드는 형세에 고구려는 한숨에 휩쓸릴 것 같았으나 그러나 우리 고구려에는 이름 높은 장수와 꾀 많은 신하가 헤일 수 없이 많이 있어 조금도 그야말로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때 고구려의 서쪽(중국 가까운 편)을 막아 있는 책임을 맡아 안시성(지금의 춘천성 개평현 탕지보)의 성주(수장)가 되어 있는 이가 양만춘 장군이었는데 10만3천의 대군이 에워싸고 덤벼드는 것을 보고
‘여기에 지키고 있는 군사가 비록 수효는 얼마 안 될망정 어찌 내가 저까짓 당병을 10만 아니라 100만 명이기로 내 힘으로 막지 못하고 서울에까지 보하야 위로 황제께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 장수 여러분의 수고로움을 끼치겠느냐. 우리는 마땅히 이 때에 우리의 힘을 시험하자’
하고 대담하게도 자기 단독으로 얼마 안 되는 수비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성 밖에 철통 같이 에워싸고 몰려드는 당병을 막아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양만춘 장군은 싸움하는 꾀도 많았거니와 용맹하기 한이 없었고 또 그 부하 군사가 전술이 기묘하여 능히 그 큰 군사를 대항하야 싸왔습니다. 그러나 원래 수효 적은 수비군이라 싸움을 오래 끌면 도저히 당하기 어려울 것을 알고 양만춘 장군이 얼른 한 꾀를 내어 스스로 성벽 위에 나서서 십리 밖에 버들잎이라도 맞춘다는 귀신같은 솜씨로 활을 재어 성 밖에 10만3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풍우같이 몰아 들어오는 천하의 영웅 당 태종의 얼굴을 향하야 쏘았습니다. 누구의 활이라고 아니 맞겠습니까. 총알같이 튀어 나간 양만춘 장군의 화살은 당태종의 왼편 눈을 보기 좋게 들이찔렀습니다.
‘아차차’ 부르짖으면서 누가 볼까 겁내어 급히 말을 돌려 바람같이 도망하였습니다.
하늘같이 귀신같이 믿고 있던 태종 황제가 도망하는 것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진이 어지러워지는 틈을 타서 우리 고구려의 수비군은 양 장군의 호령대로 일시에 함성을 치면서 내여 무찌르니 장수를 잃어버린 군사들이 마른 풀 같이 칼끝에 베어지고 간신히 남은 놈이 구름같이 흩어져 도망하는 뒤를 따르며 닿는 대로 베이니 간신히 살아 도망하야 당태종의 뒤를 따른 놈이 불과 2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급급히 도망하느라고 왔던 길을 잃고 산중으로 헤매어들어 주린 배를 안고 추위에 떨게 되니 그 적에야 당 태종 이세민이
“죽은 위증이가 말리든 말을 들었으면……그가 살아 있으면 이 일이 없었으리라.”
하고 후회의 눈물을 지었습니다.
이리하여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는 조선을 침범할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안시성 승전인데 백제가 진평 땅에서 위나라 군사 수십만 명을 무찌른 싸움과 또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 싸움과 합하야 조선 역사에 유명한 세 가지 싸움 중의 하나이니 그 때는 우리(한검)의 건국기원 2887년(을사)이요, 고구려 보장왕 2년 때의 일입니다. 겨우 몇 명 안 되는 수비군으로 뜻밖에 몰려드는 10만 대적을 외로이 막아 그같이 용맹하게 몰리치어 나라로 하여금 아무 걱정이 없게 하고 동포로 하여금 적군의 말굽에 밟힘이 없게 한 양만춘 장군과 그 군사의 용맹은 우리들의 길이길이 잊지 못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