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2호
<사화 - 이달의 역사>

정포은과 이율곡 - 2월 중에 탄생하신 두 분 선생 이야기

차상찬


1. 정포은 선생

여러분 중에는 개성의 선죽교구경을 하신 이가 계실 것입니다. 그 선죽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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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592년 전-바로 고려 충숙왕 6년 정축 12월 23일에 경상북도 영천 땅에서 나셨습니다. 그가 난 날을 다시 양력으로 따진다면 곧 2월 2일이올시다. 그의 어머니는 변한국부인 이씨였는데 포은 선생을 나실 때에 꿈에 난초분(蘭盆)을 안고 있다가 떨어뜨리고 놀라 깨어 선생을 낳았음으로 어렸을 때의 이름을 몽란(夢蘭)이라고 지었더니 선생이 아홉 살 되던 때에 그 어머니가 낮잠을 자다가 또 꿈을 꾼 즉 뒷동산 배나무 위에 시꺼먼 용이 올라감으로 이상히 여겨 나아가 본즉 용은 간데없고 선생이 장난을 하노라고 나무 위에 올라가 있음으로 그의 어머니는 퍽이나 기뻐하야 다시 선생의 이름을 고치어서 몽룡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에 세상 사람이 다 부르는 몽주라 하는 이름은 실상 그가 성관(成冠)한 뒤에 다시 고친 이름이올시다. (자는 달가 입니다) 그는 태어난 때나 자랄 때에 그와같 은 이상한 몽조(夢兆)가 있었을 뿐 아니라 날 때부터 두 어깨 위에 검은 점이 일곱 개가 마치 하늘의 북두칠성 모양으로 벌려나고 얼굴이 준수하며 성질이 호매(豪邁)함으로 그 어머니는 그가 장래에 큰 인물이 될 줄을 미리 짐작하고 특히 사랑하며 교육을 잘하였습니다. 한번은 선생이 좋지 못한 여러 소년들과 섞여서 장난을 하였더니 그 어머니는 그것을 경계하기 위하야 백로가(白鷺歌) - ‘가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창파(滄波)에 씻긴 몸이 더럽힐까 하노라’ 란 노래를 지여 드렸더니 선생은 크게 깨닫고 이번에는 자기가 오두가(烏頭歌) ‘오두가는 가마귀의 머리 빛이 변치 않는 것과 같이 자기의 마음이 변치 않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란 노래를 지여 그 어머니에게 맹서하고 다시는 나쁜 아이들과 함부로 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라매 학문을 깊이 연구하야 당시 고려에 제일 가 는 학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나라 다스리는 일과 남의 나라와 교제하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고 또 나라를 위하는 충심이 갸륵하야 밤과 낮으로 자나 깨나 항상 충성을 다하야 나라 일을 하였습니다. 본국에 있어서 여러 가지 정치를 잘함은 물론이요 지나(支那)의 명나라 또 일본 같은 외국으로 여러 번 사신으로 가서 갖은 고생을 다하야 가며 고려의 이로운 일을 교섭하야 큰 성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고려는 벌써 국운이 이미 쇠퇴하야 위로는 군인이 무능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가 모두 나라 일을 잘못하야 인심이 매우 불안한 중에 무신 이 태조는 날마다 세력이 늘어가니 고려 조정에서 벼슬하든 사람들까지도 의리는 조금도 생각지 아니하고 추세부세로 모든 이 태조에게 추축하야 고려의 왕조를 없이하고 새로이 이 태조를 추숭하야 왕을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려에는 포은선생과 같은 큰 인물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고려가 그와 같이 쇠퇴하고 이태조가 그와 같이 세력이 크더라도 누구나 감히 꿈쩍을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야 이태조의 부하들은 여러 번 선생을 권유하야 이 태조에게로 귀순하도록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원래 충심이 갸륵한 선생은 조금도 마음을 변치 않고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한 나라를 위하야 일하기로 맹서하니 이 태조의 부하는 할 수 없이 최후로 선생을 아주 죽여 버리려는 음모를 하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임신년 4월 초승에 이 태조가 황해도로 사냥을 갔다가 말에 떨어져서 집에 돌아와 누었으매 선생은 이 태조의 문병을 하러 갔더니(실상은 선생이 이태조의 집에 간 것은 문병보다도 태조의 행동과 여러 가지의 형편을 살피러 간 것입니다.) 태조의 부하가 그것을 가장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조영규 등 역사(力士) 세 사람을 선생의 돌아오시는 길인 선죽교 밑에다 매복하였다가 선생이 그곳에 오심을 엿보고 미리 예비하야 가졌던 철퇴(鐵椎)로 선생을 때리니 선생과 선생의 녹사(錄事) ‘녹사는 지금으로 치면 밀서 같은 것입니다’ 김경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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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그때 나이는 오십육세였고 때는 임신년 4월 4일이었습니다. 선생이 돌아가던 그해 7월에 고려도 또한 따라 망하고 이 태조는 고려의 왕위를 차지하야 드디어 이씨조선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2. 이율곡선생

조선에서 산수 좋기로 유명하고 경포대 같은 명승지가 있기로도 유명하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곶감 많기로도 유명한 강원도 강릉읍에서 북으로 북으로 한 10여리가량을 가면 북평이라는 한 깨끗한 촌락이 있고 그 촌락의 동산 밑에는 솔나무와 밤나무가 우거진 속에 옛 빛이 창연(蒼然)한 기와집 한 채가 있어서 뒤뜰에는 오죽(烏竹)이 사시로 푸르고 문 위에는 몽룡실(夢龍室)이라는 현판이 달려있으니 그 집은 우리 조선에서만 유명할 뿐 아니라 외국에까지도 이름이 널리 전한 율곡 이이 선생님이 나신 오죽헌이라는 오랜 집이올시다. (몽룡실은 곧 선생이 출생한 방입니다) 이율곡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393년 전 -이조 중종대왕 31년 병신년 12월 26일 (양력으로 2월 5일)에 나셨으니 그의 아버지는 이원수라 하는 이요 어머니는 신진사명화 (이묘명현)의 따님으로 문장과 서화가 당시에 일류로 치던 유명한 사임당 신씨올시다. 그런 어머니의 피를 이여서 태어난 율곡 선생은 어려서부터 행동과 기량이 남보다 특이할 뿐 아니라 천재가 또한 비상하야 3,4세 때에 벌써 시를 능히 지었습니다. 세살 때의 외왕모 되시는 이씨 부인이 그를 업고 다니다가 석류 한 개를 따서 주고 시를 지라고 하였더니 선생은 응성즉답(應聲卽答)으로 ‘석류피리쇄홍주(石榴皮裏碎紅珠)-석류 껍데기 속에는 붉은 구슬이 부서졌다’ 라고 지으니 세상 사람들이 다 놀래서 신동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네 살 때에는 또 어떤 글방에서 사략초권(史略初卷)을 배우는데 선생이 토를 잘못 붙이니까 고쳐서 바로 붙임으로 그 선생이 크게 놀래었습니다. 또 7세 때에는 그 이웃사람의 진복창이라는 사람의 전기를 장난으로 지라고 하였더니 그는 그 진씨를 평하야 짓되 ‘이 사람이 외면으로 보면 좋은 것 같으나 내심은 좋지 않은지라 이 사람이 만일 세력을 얻는다면 반드시 세상을 어지러이 하리라’ 하더니 그 뒤에 진씨가 과연 그러한 행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만 가지고 보더라도 선생은 어렸을 때에 벌써 지감(知鑑)이 많아서 남의 옳고 그른 것과 또 장래에 어찌될 것을 능히 아는 천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13세 때에 진사의 시험을 마치고 14,5세 때에는 아주 문장이 크게 성가되야 이름이 전국에 날리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16세 때에 그를 사랑하고 교훈하던 현모 신씨가 돌아가고 그의 아버지는 다시 첩을 얻어 살게 되니 선생은 부득이 서모 시하에서 지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물론 가진 효성을 다하야 그 아버지와 서모를 섬기었으나 원래에 서모는 사람이 불량한 까닭에 그 그늘에서 도저히 살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야 19세 되던 때에 선생은 집을 멀리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1년 동안이나 불경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뜻에 맞지 않음으로 다시 산에서 내려와서 그때 도학자로 유명한 이퇴계 선생을 찾게 되었습니다. 퇴계 선생은 선생을 한번 보매 크게 사랑하고 또 지도한 결과 그로부터 선생은 학문이 날로 깊어가고 명망이 한 나라에 높게 되야 차차로 조정에 벼슬을 하게 되매 최후에는 병조판서-지금의 육군대신-라는 지위 높고 책임 중대한 벼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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