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7호
<사담>

정몽주 선생 - 500년 전 위인 정몽주 선생 이야기

신영철


여러분! 정몽주 선생을 모르겠거든 요전 《어린이》에 났던 정포은(鄭圃隱) 선생을 기억하십시오.
몽주는 포은 선생의 실상 이름이요 포은은 그의 별호(別號)인데 포은 선생은 그의 어머니가 선생을 배었을 때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떨어트리는 통에 꿈 몽자, 난초 난자 몽란(夢蘭)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선생이 아홉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또다시 낮잠을 주무시다가 검은 용이 나무에 올라가는 꿈을 꾸시고 내다보니 선생이 마침 나무에 올라감으로 좋은 꿈이라 하야 선생의 이름을 꿈 몽자, 용 룡자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가 나중 어른이 된 뒤에는 아주 몽주라고 고쳐서 선생에게는 그와 같이 이름이 많습니다. 선생의 나신 곳은 경상도 영천군 동우황리라는 작고도 좁은 시골 마을이지만 그의 이름은 당대 고려 전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중국에까지 뻗쳐나가고 조선의 반만년 역사에 훌륭한 한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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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포은 선생의 대강 내력은 요전 호에서 읽으셔서 이미 기억하실 줄 압니다마는 선생은 과연 그와 같이 효행으로, 학문으로, 충성으로 이름이 자자하신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장한 일은 국가와 사회를 위하야 동포와 임금을 위하야 일하신 그것입니다. 그러면 포은 선생은 그의 일생 56년 - 처음 땅에 떨어져서 선죽교에 피를 흘리고 돌아가신 그 동안 무슨 일을 하셨던가? 여러분의 마땅히 궁금해 하실 일인가 합니다.
선생은 스물한 살이라는 아주 갓 젊은 때에 감시(監試)라는 과거를 보아서 많은 선비 중에 셋째 장원을 하고 스물네 살 때에 또 다시 과거를 보아 세 번이나 연해 첫째로 장원급제를 하야 이름이 세상에 당당히 나게 되니 그것이 선생으로 해서는 출신한 시초였습니다.
그 후부터는 벼슬이 해마다 올라가서 밖으로 나가서는 무관(武官)이 되야 도적과 외국 적군과도 싸워 공을 나타내기도 하고 안으로 들어오면 문관(文官)이 되야 모든 제도와 정치를 고치고 밝히었습니다.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고 우수한 인물을 뽑아 중국에 유학시키고 권력 있는 놈들이 억지로 빼앗은 인민의 전답을 찾아주고 의복을 개량하고 예절을 밝히고 곡식을 저축하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첨(水站)을 실시하야 배질과 물건 운반을 편케 하는 등 잘못된 사회 제도를 고치고 문명사업을 하는 데는 남과 싸우고 남의 의논을 물리쳐가며 억세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잘못된 제도면 때려 부수고 새로 세우는데 용맹스럽게 하고 조금도 묵은 습관이나 옛 풍속을 돌아보지 아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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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때에는 워낙 고려의 국가가 말세가 되어 거의 넘어져 가려는 집과 같이 담이 무너지고 벽이 떨어지고 지붕에서 비가 새고 창으로 바람이 쏟아 들어오는 것처럼 국가의 안 정사가 너무나 시끄럽고 밖으로는 외국의 침노가 많아 남쪽에는 일본의 적군이 가끔 시끄럽게 하고 북쪽으로는 명나라의 간섭이 극심하야 견디기가 어려웠으나 누구 하나 외국과 교섭하야서 국가를 무사케 하려는 이는 없었으되 오직 선생이 홑몸으로 일본에 가고 명 나라에 가고 해서 무슨 일이나 척척 무사히 해결시켰습니다.
모든 방면에 능란한 선생은 외교도 잘 하고 말 재주도 많아서 외국에 갔을 때마다 두터운 대우를 받고 무쌍한 칭찬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에 일본 적군이 변방에 늘 와서 인민을 괴롭게 하되 조정에서는 군사로 막을 힘이 없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지만 일본서는 도리어 그 사신을 잡아 가두어 거의 굶어 죽게 된 일이 있은 후로는 죽음을 무서워하며 감히 건너가려는 이가 없었지만 오직 선생은 조금도 어려운 빛이 없이 일본까지 가서 모든 이해를 쭉 말함에 일본의 주장들이 감복치 않는 이가 없으며 대우가 극히 후하였고 중과 선비들은 선생의 글을 얻으면 무슨 보배나 얻은 것처럼 기뻐하여 날마다 자기네 어깨로 선생을 가마에 태우고 명승지를 구경시켜 주었으므로 지금도 선생이 일본에 가서 지은 시가 많이 전해 옵니다.
또 명나라에서도 까닭을 피는 일이 많아 선생이 4,5차나 외교 일로 갔다 왔다 하였지만 언제나 일을 무사히 만들어 가지고 오면서도 극도의 후대를 항상 받았습니다. 한번은 명나라 서울 남경까지 급히 가야만 쓸 일이 국가에 생겼으되 다른 사람은 다 가기를 무서워하고 끌려하였지만 홀로 선생이 임금의 친명을 받아 가지고 그때 같이 교통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절에도 개성서 남경까지 팔천여리나 되는 먼 먼 길을 험한 산과 풍파 많은 물 속으로 겨우 50일이라는 날짜를 가지고 도착하야 있을 일을 없게 만들고 도리어 명나라 사람들을 감복시키고 역시 많은 후대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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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선생은 그와 같이 국가와 인민의 일이라면 물이라도 들어가고 불이라도 피하지 아니하고 어떠한 혐난이라도 무릅쓰고 나가셨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국세는 날로 달로 글러져서 선생의 지성과 수단을 가지고도 다시 자빠지는 집을 붙들어 일으킬 수가 없어서 필경은 자기의 한 목숨을 바치고 말았습니다.
그 때 고려가 거의 거의 망해가던 그때 물론 인물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중에도 큰 인물로는 최영 장군과 포은 선생이 협력하야 묵은 국가를 다시 일으키려 애 쓸 뿐이요 그 나머지는 대개가 이성계라는 새 임금을 세워 새 나라를 개척하려고 공모하였습니다. 그래 최영 장군도 선생을 앞서서 이 태조(즉 이성계)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마치고 포은 선생도 할 일 없이 어머니께 깨끗이 받은 정신, 자기의 노래와 같이 꿋꿋한 절개로 뜻을 변치 않고 지금으로 535년 전 4월 4일에 이 태조의 부하에게 선죽교 다리 위에서 방망이를 맞아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훌륭한 인물은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기울던 집은 영영 쓰러져 자빠지고 말았습니다. 포은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석 달도 못되어 고려 나라는 아주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선죽교 돌 위에 흘린 한 줄기 피는 오백년 바람과 비에도 씻기고 깎이지 아니하여 성인비(成仁碑)에 젖은 눈물은 죄는 햇빛, 더운 바람에도 마르지 않고 이상하게도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선생의 몸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의 혼은 반드시 몇 천 년 몇 만 년을 가면서라도 우리 조선 사람에게, 또는 온 세상 사람에게 깨끗한 교훈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포은 선생의 어머니는 변씨인데 요 전호 인쇄할 때에 잘못 되어 빠졌으므로 여기에 말씀하여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