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1호
<사담><역사>

목화 이야기

색동회 최진순


목화라면 조선 사람으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목화의 은혜를 아니 입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이칼라 양복만 입는 사람이라도 그 덮는 이불 속에는 솜이 있을 것이며 비단옷만 입는 사람이라도 그 옷 속에는 솜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귀중하고 보배다운 목화가 지금으로부터 560년 전에 우리 조선에 그 이름까지 없었습니다. 조선뿐 아니라 지나 천지에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귀한 것을 우리 조선에 가져온 사람은 문익점이란 양반입니다.
이 양반이 일찍이 지나에 사자가 되어 갔다가 어떠한 일로 그 나라 임금에게 죄를 받아 교지란 곳(지금 불 영 인도지나 북부에 있는 河內란 곳)에 정배를 갔었습니다. 그후 선생은 지나 임금(그때가 원나라인데 순제란 임금)의 경해( 解)를 얻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560년 전입니다.
이때에 선생이 그곳을 떠나 얼마 아니 오다가 밭 가운데에 눈 같은 꽃이 조그마한 나무에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심히 이상하고 아름답게 여겨 하인을 시켜 따왔습니다.
어떠한 노파가 소리를 지르니 따라오며 하는 말이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인데 이 금물(禁物)을 감히 따 가느냐. 이것을 관청에서 알기만 하면 너와 내가 다같이 죄를 받을 것이니 속이 내어 버리라.』고.
매우 성이 나서 덤비다가 문득 선생의 자태가 단정한 것을 보고 노파는 딴 사람 같이 공손히 낮은 목소리로 선생에게 말하되
『이것이 목화란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이것을 다른 나라로 가져가기를 엄중히 금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말 이것을 원하시면 깊이 깊이 감추어 들키지 아니하게 하십시오. 이것을 들키면 당신뿐 아니라 나도 못살게 되니 부디부디 조심하여 주십시오.』
합니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 이 씨 몇 개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조선에 첨으로 목화가 들어온 시초입니다.
그 이듬해 봄에 이 목화씨를 비교적 마른 곳과 눅은 곳을 가리어 심어놓고 모든 정력과 성심을 다하여 가꾸었습니다. 처음이 되다보니 경험과 방법을 몰라 잘 자라나다가도 말라죽어 첫 해에 겨우 한 나무를 살리어서 그 씨를 근근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3년을 지난 후에 이력을 얻고 방법을 알게 되어 차차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원근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서로 다투어 이 씨를 얻어다가 심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점점 13도 방방곡곡으로 퍼지게 되어 지금은 삼척동자라도 목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노소와 존비를 막론하고 이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것을 이용할 줄 몰라 또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때에 마침 원나라 중 장(蔣)이라는 사람이 반도의 산수를 구경하러 왔다가 목화꽃이 봉울봉울 피어있는 것을 보고 먼 남쪽나라에 있는 것이 이곳에도 있다 하여 매우 이상하고 아름다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이 문익점 선생의 장인 정천익이라는 이 집에 오래 동안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이 목화를 이용할 줄 몰라 애쓰는 것을 보고 드디어 「트리개(去核機)」를 만들어 솜 만드는 법을 가르치었습니다. 이로써 목화를 이용하는 단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문 선생의 손자 문래란 사람이 지금 일반으로 쓰는 소위 물래를 발명하고 또 그 손자 문영이라는 이가 이 실로 베 짜는 법, 즉 「무명」짜는 법을 생각하여 내었습니다.
이 후로 그 용도가 나날이 늘게 되었습니다 .더욱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날마다 쓰는 「물래」와 「무명」이 문래(文來)와 문영(文英)이라는 사람 이름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의 장손 승어라는 이가 경상북도 의성군수가 되어 밭을 사서 친히 목화를 배양하고 그 방법을 백성에게 가르치어 매우 목화재배를 장려시켰습니다.
이 후로 그 고을 사람들이 열심으로 목화를 심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의성 목화라면 유명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