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3호
<사담>

정충신 이야기 - 17세 소년장군 정충신 원사의 이야기

차상찬


이조 선조대왕 때에 소년 장군 정충신이라 하면 누구나 별로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올시다. 그의 자는 가행(可行)이요, 시호는 이순신 씨와 같이 충무공이올시다. 그리고 또 금남군을 봉한 까닭에 정금남이라고도 하며 전라남도 광주 사람이올시다. 그의 7대조는 고려 명장 정지 씨요, 그의 아버지는 광주의 향좌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향좌수로 있을 때에 하루는 비가 삼대 같이 오는데 몸이 곤하야 향청에서 낮잠을 자다가 홀연히 꿈을 꾸니까 향청 부엌에 오색구름이 찬란하게 끼고 황룡이 꿈틀거리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꿈을 깨인 뒤로 이상이 여기고 부엌을 가서 보니 아무 것도 없고 다만 밥 짓는 관비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그 관비를 자기 아내 같이 사랑하였습니다. 그날부터 그 관비는 뜻밖에 태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온몸에 보기에도 끔찍끔찍하게 부스럼이 나서 누구나 옆에 가기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열 달 만삭이 되야 부스럼도 다 깨끗이 아물고 일개의 귀동자를 나셨으니 그가 곧 정충신이올시다. 정충신의 근본으로 말하면 물론 명문가이지만은 그의 어머니가 천한 관비이기 때문에 그 때 세상 사람들이 정충신을 천히 여기고 그도 또한 소년 시대에 영문의 통인(통인은 지금의 급사(심부름꾼)과 비슷한 것입니다)이라는 천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체격은 비록 적으나 눈이 샛별 같고 얼굴이 관옥 같이 고우며 말이 또한 천하 변사일 뿐 아니라 장부의 기개가 있고 임기응변으로 사기를 잘 살피여서 무슨 일이던지 그가 한번 계획을 하면 백발백중으로 다 잘되고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으로 통인으로 있을 때에도 같은 동무들이 모두 비범하게 알고 다 그를 경애하였습니다. 한 번은 어떠한 기생이 절도사(절도사는 지금 도지사 비슷한 것)의 먹고 남은 음식을 주니까 그가 받아먹지 않고서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절도사가 되야 음식을 먹다가 남을 줄지언정 남의 먹던 턱찌끼를 먹지 않겠다.”
고 하였습니다. 그 한 일만 보아도 그의 인격이 얼마나 고상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통인으로 있을 때에 집이 어찌 가난하였던지 겨울날에도 이불이 없고 다 해진 옷을 입고 다니면서 절도사의 심부름을 하는데 혼자말로
“제기-, 백목 한필만 있으면 의복 일습과 이불을 다 만들 터인데 그것이 없다.”
고 한탄하였더니 절도사가 그 말을 듣고 단 한필로 어떻게 의복과 이불까지 만들려노 하고
“내가 백목 한필을 줄 터이니 만일에 의복 일습과 이불을 다 만들지 못하면 엄벌을 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그는 쾌히 대답하고 나가서 두루마기 한 벌만 해 입고 왔더니 절도사가 거짓 노하고 책망하야 가로되
“네가 백목 한필로 의복 일습과 이불까지 만든다 하더니 두루마기 한개만 해서 입었으니 관장을 속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그는 조금도 서슴지 않고 대답하기를 두루마기 하나면 저고리, 바지를 다 겸하야 입은 셈이요, 밤에는 그것을 덮고 자니까 그것이 또 이불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절도사는 크게 웃고 기특히 여기고 뒤부터는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사랑하였습니다.
선조대왕 임진란 때에 그는 겨우 17세의 소년이었습니다. 그 때에 선조대왕은 의주로 피난을 가시고 권율이 권 대장이 광주 목사가 되야 군사를 모집하고 의주에 계신 선조대왕께 장계(장계는 통신과 같습니다)를 할 터인데 그 때에 중로에는 적병이 모두 길을 막고 있어서 조선 사람을 보기만 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함부로 죽이는 까닭에 누구나 위험하게 생각하고 가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리하야 권 대장은 크게 걱정하고 있었더니 어린 정충신이 그 말을 듣고 분연히 나서서 가기를 자원하였습니다. 그는 당신으로 칼 하나를 지팡이 삼아 집고 도보로 떠나서 그 위험하고도 수천 리나 되게 먼 의주를 갔습니다. 이것이 정충신의 처음으로 세상에 출각하는 첫 걸음이올시다. 그 얼마나 용장하며 충성스럽습니까. 그 때에 오성 부원군 이항복 씨는 병조판서로 선조대왕을 모시고 역시 의주에 있었습니다. 정충신을 한번 보고 크게 기특히 여기어 자기의 집에 데려다 두고 의복과 음식을 후대하고 또 친히 글을 가르치니 그의 재주가 비상하여 불과 몇 달에 여러 경서를 다 통하매 오성이 크게 기뻐하야 자기의 아들과 같이 사랑하고 또 그 문하에 있는 명사 이시백, 장유, 최명길 같은 여러 사람과도 친밀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가을에 그는 무과급제를 하매 선조대왕이 오성부원군을 보시고 말씀하야 가로되
“그대가 항상 정충신의 칭찬을 하더니 과연 급제를 하였다.”
하시고 충신을 불러 말씀하되
“네가 아직 나이 어리니까 공부를 하야 장래 국가의 큰 인물이 되라.”
고 하시었습니다. 그는 임진란 때에도 물론 공이 많았지만은 그 뒤 인조대왕 때의 이괄난과 호란에 큰 공이 많았습니다. 그가 만포첨사로 있을 때에 정부의 명령으로 호인에게 사신을 갔었는데 호인의 대장이 책망하야 가로되
“귀국에서 우리를 가리켜서 항상 도적놈이라 하니 그것이 무슨 모욕의 말이냐?”
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다 겁을 내고 모호한 답변을 하겠지마는 원래 변재가 능한 그는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대답하되
“네가 천하를 도적할 야심이 있으니 도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니까 호인이 크게 웃고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그는 돌아온 뒤에 조정에 말하기를 이후 국가의 근심은 일본에 있지 않고 호인에게 있다 하고 그 방비할 계책을 말하였으되 조정에서 능히 그 계책을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뒤 병자년 봄에 정부에서 호인과 절교한 소식을 듣고 그는 병석에서 일어나 탄식하되 국가의 흥망이 금년에 결정이 되리라 하더니 그해 11월에 과연 호병이 들어와서 남한산성의 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인조 계해년에 그는 안주 병사가 되고 장만은 도원사로 평양을 진무하고 이괄은 부원수가 되어 영변을 진무하야 호인을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이괄이는 수하에 용맹한 군사 수만 명과 항복한 왜병 수천을 데리고 있어서 세력이 가장 크고 신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괄은 본래 정부에 대하야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있던 중 자기의 세력이 큰 것을 믿고 반란을 일으켜서 불과 며칠에 여러 골을 점령하고 경성까지 함락하였습니다. 그 때에 정충신은 안주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도망하였습니다. 그때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겁하고 또 이괄과 내응이 있다고까지 말하였으나 그러나 실상은 정충신이 원래 이괄과 친절한 새이기 때문에 만일에 안주에 있으면 세인의 의심을 살까하고 평양으로 도망하야 도원수 장만과 일을 의논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장만의 부하에 있어서 여러 가지의 계책을 내서 장만을 가르치고 자기는 선봉대장이 되고 남이흥은 후군 대장이 되야 이괄의 군사를 크게 파하고 이괄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 공로로 그는 진무공신일등훈을 타고 또 금남군의 봉작을 받고 평안병사의 영직(榮職)까지 하였습니다. 그 뒤 정묘호란에는 부원수가 되어 많은 공을 이루고 병자호란 후에는 일시 원통한 죄에 몰리여서 충남 당진군으로 귀양을 갔다가 다시 풀려서 포도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의가 퍽 장했습니다. 그가 오성 부원군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은 위에 잠깐 말씀한 것과 같거니와 그는 오성 부원군의 은혜를 특히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비록 고관대작이 된 뒤에도 한날한시 같이 그에 대한 신의를 지키었습니다. 오성 부원군이 북청에 귀양 갔을 때에도 그가 같이 가서 만반의 편리를 도와주고 또 그를 위하야 북변기라는 일기책을 만들고 그가 사약으로 돌아간 뒤에는 삼년간 복을 입었습니다. 어느 점으로 보던지 정충 씨는 참으로 갸륵한 양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