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2호
<사담><역사>

최영 장군

신명균


최영 장군은 고려 때 어른으로 우리 3천6백4십9년(충숙왕 3년)에 나셨습니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씩씩한 장부의 기상이 있고 원력이 동무들 중에 뛰어나셨드랍니다. 장군이 자라신 뒤에는 도통(都統……육군대장)과 시중(侍中……大臣)이란 벼슬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라에 난리가 있으면 나가서 대장이 되시고 난리가 평정되면 들어와 정승이 되셔서 정몽주 어른과 한가지 넘어져 가는 고려조의 기둥이 되시고 주초가 되셨습니다. 그러다가 이 두 어른이 돌아가시매 고려조는 이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장군의 집안은 매우 엄격한 집안일 뿐더러 그 아버님은 청백하기로 유명한 어른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장군이 16세 되시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아버님께서는 운명을 하실 때에 사랑하는 아드님께 이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너는 금(金)을 보기를 돌과 같이 하여라』장군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새겨서 아버님의 깨치신 뜻을 조금도 저버리지 않고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하실 뿐 아니라 한결 같이 공평하고 청백함을 지키셨습니다. 한 나라의 대장이요 정승으로 계시면서도 이따금 끼니를 걱정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장군이 워낙 공정하고 바른말을 잘하는 까닭에 옳지 않은 무리를 보시면 곧 그 그른 것을 말씀하시고 물리쳐 내시고 진실한 사람을 보시면 극진히 애호하여 높은 벼슬을 시키시되 추호도 사사가 없으시니 올지 않은 무리들은 장군을 원수같이 미워하였지만 백성들에게는 장군이 큰 믿음이 되고 큰 의지가 되였습니다. 공민왕이 돌아가시고 강릉대군 우가 새로 임금이 되시니 나이가 겨우 10세올시다. 가뜩이나 나라가 어지러운데다가 임금조차 나이가 어리시니까 나라는 더욱 더욱 어지러워지고 왜적의 침노는 날로 심해져가서 남쪽 지방은 거의 편안할 날이 없고 북쪽으로는 홍건적이 이따금 국경을 범해 나라를 요란케 함으로 늙은 장군은 손에서 무거운 창을 놓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장군은 나이가 70이 넘어서 80줄에 드신 노인이건마는 기개와 용맹은 청년시대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시더랍니다. 장군은 소시로부터 부여나 발해나 숙신이나 고구려의 옛 땅들이 까닭도 없이 남의 손에 들어간 것을 항상 분하게 여기셔서 기회만 있으면 이 땅을 도로 회복해보시려고 여러 번 계획을 내어 보셨으나 한 사람도 여기에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장군이 바로 73세 되시던 해에 일이올시다. 명나라는 철령(鐵嶺……지금 만주) 북쪽을 저희 나라 땅이라고 그 땅을 차지하려 듭니다. 이때는 마치 만주 일판에서 호기를 부리던 원나라가 망해가는 판이었습니다. 기회를 기다리던 장군은 때가 왔다 하시고 임금께 이런 틈을 타서 요동을 치면 칼날에 피도 묻힐 것 없이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니 요동을 치자고 여쭈었습니다. 우 임금은 매우 영특한 어른이라 장군의 뜻을 크게 찬성하시어 즉시 여러 신하를 모아 가지고 요동 칠 일을 의논하시니 모든 신하가 다 반대를 합니다. 임금께서는 자기가 서울(개성)에 있어서는 암만해도 일이 안될 듯 하시니까 사냥 간다 핑계하시고 서해 도 봉주(지금 황해도 봉산)에 가 앉으셔서 장군과 이 태조를 불러 가지고
『내가 기어코 요동을 쳐서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하라』하셨습니다. 이 태조께서는 여러 가지로 불가한 것을 말씀하셨으나 임금은 듣지 않으시고 또 평양으로 가셔서 한편으로는 압록강에 다리를 놓게 하시며 또 한편으로는 승병을 모으신 후에 장군으로는 팔도도총사(육군 대원수)를 삼으시고 조민수로는 좌군통사 이 태조로는 우군통사르 삼으셔서 모든 장졸을 거느리고 평양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때에 장군은 임금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방 대군이 길을 떠났사온데 만일 달이 넘는다하면 대사는 이룰 수 없사오니 신이 가서 싸움을 독촉하겠나이다.』한즉 임금께서는『경이 갈 것 같으면 나는 누구와 더불어 정사를 의논하랴.』하시고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루는 한 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요동 군사들은 호적을 치러가고 성 중에는 군사가 별로 없으니 만일 이런 기회를 타서 대국이 온다하면 싸울 것도 없이 이기겠다』합니다. 이 말을 들은 장군은 기뻐하여『임금께서 서울로 가시면 노신이 군사를 지휘하여 한 번 싸움에 요동을 쳐 이기오리다.』하여 재삼 말씀을 하였으나 듣지 않으셨습니다.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서 위화도에 이르렀습니다.
이 태조 어른은 본디부터 고려조를 엎지르고 자기가 임금이 되려는 생각을 가지셨습니다. 그 뜻을 펼만한 기회가 없습니다. 자기도 요동을 치는 것이 좋은 줄은 아시나 자기의 뜻을 이루려면 도저히 요동을 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임금께 상서를 하고 군사 돌이키기를 청하였습니다. 임금께서는 듣지 않으시고 어서 진군하기를 재촉하시며 장군은 군사를 더 보내서 두 길로 요동을 치도록 하였습니다.
이 태조는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으로 장졸을 효유해 가지고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켜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 태조는 군사를 거느리고 즉시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장군은 크게 분개하여 이것을 대항하였으나 어쩌는 수가 없었습니다. 장군은 하는 수 없이 대궐 안으로 들어가니 군사들은 장군의 뒤를 따라 대궐로 들어와서 팔각전을 겹겹이 둘러싸고 장군을 붙들어 냈습니다. 이 태조는 장군과 정몽주 어른과 그 외에 본디 장군과 뜻이 같은 사람들을 모조리 해하였습니다.
장군은 형장으로 나가서 형을 당하실 적에도 사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더랍니다. 장군이 죽어서 시체가 길거리에 놓이게 되니 보는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이나 눈물을 흘리고 상민들은 철시를 하여 슬퍼하였습니다.
장군의 크신 포부는 천재일우의 좋은 시절을 당하셨다가 위화도의 회군이라는 무서운 서리를 맞아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려! 장군은 돌아가신 뒤에도 과연 눈을 감으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