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9호
<동화>

박문수이야기 - 지팡이 하나

고한승


옛날에 우리나라 유명한 양반으로 팔도 어사를 지내든 박문수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면서 별별 기괴한 일을 많이 당하셨는데 그 중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요.
하루는 어느 시골길을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가노라니까 저쪽으로부터 어떠한 사람 하나이 헐떡거리고 옵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박문수 박 어사를 보고
"내 뒤에 도적놈이 칼을 들고 쫓아오니 나를 좀 숨겨 주십시오."
하고는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길가에 있는 보리밭 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습니다.
도량도 넓고 꾀도 많은 박 어사라도 창졸간에 이러한 일을 당하니까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지 앞이 캄캄하였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미처 생각도 못해서 저편 고개 너머로 과연 흉악하게 생기인 도적놈이 시퍼런 칼을 들고 쫓아옵니다 그려. '아-이것 큰일 났다'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벌써 도적은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상기된 눈을 두리번두리번하면서
"너 이리로 사람 하나 지나간 것 못 보았느냐?"
하고 소리 지릅니다.
박 어사는 어쩔 줄 모르다가 얼른 대답한다는 것이
"못 보았습니다."
하였습니다.
도적놈은 눈을 크게 뜨면서
"이놈 못 보다니. 길이 이것 한 갈래 밖에 없는데 못 보아! 네가 그놈을 숨겼구나. 바로 대지 않으면 너부터 죽인다."
하고는 칼을 들어 단번에 찌를 것 같이 으르대었습니다.
자- 큰일 났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자기가 죽을 모양이요, 가르쳐주면 그 사람이 죽을 모양이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합니까? 그렇다고 도적과 대항하야 싸우자니 자기의 손에는 지팡이 하나뿐이고 도적은 시퍼런 칼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자기는 임금님의 명령을 받아 팔도로 순회하야 민정을 보살피지 않으면 아니 될 중대한 책임을 진 어사의 몸이올시다. 그려 그래서 할 수 없이 손을 들어 보리밭을 가르쳐 주고는 그대로 도망을 하여 왔습니다. 물론 보리밭 속에 숨었던 사람은 무지한 도적의 손에 죽었을 것이외다.
그날 밤에 박문수 박 어사는 어떠한 글방을 찾아가서 하루 밤을 새이게 되었습니다. 글방에는 나이가 열두어 서너살쯤 된 어린 사람들이 십여 명이서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박 어사는 글방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윗목에 가서 곤한 다리를 쉬느라고 드러누웠습니다. 온종일 걸어서 몸이 피곤하야 한잠 곤하게 자려고 하였으나 아까 낮에 자기의 어리석음으로 보리밭 속에서 죽은 그 사람의 일을 생각하니 잠이 도모지 올 리가 있습니까?
자기는 어사의 몸으로 고생하는 백성을 살려주어야 할 사람이어늘 애매한 사람을 죽게 하였구나! 어떻게 하였으면 그 사람도 살리고, 나도 살았을까?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는데, 마침 그때 글방 선생님이 동네로 놀러 나가는 모양이었습니다. 자-, 선생이 나가니까 여러 글 읽는 학도들이 책을 일제히 척척! 덮어 놓고는
"놀자!"
하고 일어섰습니다. 그러드니 그 중에 한 학도가 하는 말이
"이에 오늘은 원님 놀음을 하자!"
하니까 여러 소년들이
"그래 그것 좋다."
하더니 그 중에 제일 똑똑해 보이는 소년을 원님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원님으로 천거된 소년이 아주 점잖은 목소리로 누구는 이방을 내고 누구는 통인을 내고 누구는 사령을 내고--- 이렇게 차례와 분부를 하여 놓습니다. 그리고는 원님 행차하신다고,
"이럭거라 물러거라."
하면서 안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윗방으로 돌아다닙니다.
박문수 박 어사는 윗목에 누웠다가 하도 우습기도 하고 재미스럽기도 하야
'어디 어떻게들 하나 꼴을 좀 보자.'
하고 자는 체하고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았습니다.
그랬더니 원님 행차가 앞으로 지나가다 말고 우뚝 서서 원님이 이방을 불러 호령을 합니다.
"원님 행차가 지나가시는데 웬 사람이 코를 골고 누웠단 말이냐. 빨리 잡아 오너라."
하니까 이방과 사령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는 박 어사를 잡아 일으킵니다.
여러분! 장난으로 원님 놀음을 하는데 아무리 거지 같이 차리고 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어른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글방에 손님으로 들어와서 자는 중입니다. 그런데 어른이요 손님인 박 어사를 자기네의 장난 놀음에, 버릇없는 놈이라고 잡아가는 그들의 의기와 기운이 어떠합니까? 자, 잡혀갈 박 어사도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참말 그 소년들의 마음과 뱃심이 꽤 크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어찌하나 볼 양으로 잠자코 잡히어 갔습니다.
박 어사를 무릎을 꿇리어놓고 원님은 높은데 올라앉아서 일장 호령이 내립니다. 열두어 살쯤 된 소년이 앉아서 점잖은 어른에게 호령을 하니 참말 우스운 장난이었습니다. 그러나 박 어사도 원래 마음이 큰 분이라 잠자코 앉아서
"제발 잘못 하였으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빌었습니다.
그러니까 원님의 노여움이 겨우 풀리어
"네가 처음이요 또 법을 모르는 무식한 자이기로 이번만은 용서하여주니 이후에는 각별히 조심을 하여라."
합니다.
박 어사는
"네,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절을 꾸벅꾸벅하고는 가만히 생각하기를 '이 소년들이 이같이 영리하고 도량이 크니 반드시 이 다음에 큰 사람이 되리라' 하고 오늘 당한 일을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어떤 길가는 사람이 이러이러 하야 그 사람을 죽게 하였으니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이 다 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박문수 박 어사가 아직까지 생각하고 생각하되 종시 생각이 나지 아니한 이 문제로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원님이 가만히 팔장끼고 한참 생각하드니
"옜기! 못난 사람! 그것을 못 살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 길을 가는 사람이니 지팡이를 짚었겠지?"
"네-. 지팡이야 가졌지요. 그러나 도적은 칼을 가졌으니 어떻게 대항합니까!"
그 소년이 깔깔 웃으면서
"하하 저런 못생긴 사람 보아! 지팡이를 가졌으면 장님노릇을 하고 가지 못해?"
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지팡이를 짚고 장님 노릇을 하고 갔으면 아무도 지나간 사람을 못 보았다고 할 수가 있었지요.
박문수는 무릎을 탁! 치고 참말 절을 한번 하였습니다.
팔도 도어사로 이름 높고 꾀와 재주가 많은 박문수란 분도 이름 모르는 소년 앞에서 비로소 참마음으로 감복을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그 영리한 소년은 물론 박 어사가 잘 출세를 시키어서, 훌륭한 인물이 되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