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7호
<사담><역사>

온 세상을 흔들던 가난뱅이 허생원(1)

이병화


◇ 억척같은 살림에 꺽이지 않는 결심

남산 밑 먹적골에 허생원이란 사람이 살았습니다. 어찌도 구차하든지 집이라고 오막살이 초가 몇 간 있는 것도 밖에서 이슬비가 오면 방안에서는 소낙비가 올 뿐 아니라 항상 끼니가 간데 없건마는 생원님은 들어앉아서 글만 읽고 아무 하는 벌이가 없었습니다.
후구한 세월을 이 모양으로만 보내니 살림 꼴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바느질품, 빨래 품을 팔아서 지성으로 남편의 뒤를 거두어가던 그 마님도 얼굴에 원망하는 빛이 보이고 가끔 핀잔주는 일까지 있어 갑니다. 허생원도 집안의 어려운 것이 자기의 허물인 줄 모르는 것도 아니요 또 나가서 벌이를 하면 자기 살림 하나쯤은 걱정 없이 지내게 할만한 재주가 없는 것도 아니지마는 이렇게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어가며 글만 읽는 것은 앞으로 큰 준비가 있음이올시다. 곧 많은 이치를 깨닫고 큰 재주를 닦아서 정한 뜻을 이루어보자는 생각이 간절함으로 배고픈 것 살기 어려운 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었던 까닭이올시다. 사나이가 마음에 정한 뜻이 있으니 아무 것이면 이것을 휘며 속에 큰 경륜을 품었으니 작은 고생이 어찌 이것을 움직이겠습니까.

◇ 나서는 길로 장안 갑부 변 부자에게

몇 해를 지냈던지 알만한 일을 다 알고 할만한 공부를 다 하였습니다. 하루는 옷을 떨치고 집을 나서니 그윽한 웃음이 두 뺨에 드러납니다 원래 가난한 생원님으로 오래 들어앉았기만 하였으니 별로 아는 이도 없고 또 알 리도 없습니다. 바로 종로 네거리로 가서 문득 한사람을 보고 지금 서울서 제일가는 부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변 아무라고 하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허생원은 그 길로 그 집을 찾아가서 아무 인사도 없이 무엇을 믿는지 조금도 서슴지 않고
『나는 형세가 구차하고 좀 해보려는 일이 있기로 그대에게 만금(萬金) 하나를 꾸려하오.』하였습니다. 변 부자도 또한 무엇을 보았던지 선뜻
『그러시오.』
하고 곧 만금을 내어주니 허생원은 고맙단 말 한 마디 없이 덥석 받아 가지고 갑니다. 이때 그 자리에 앉았던 부자의 자질(子姪)들이면 손(客)들이 허생원을 보니 실 대(帶)는 갈갈이 해어지고 가죽신이란 것은 뒤축이 찌그러진 데다가 갓은 납작하니 주저앉고 윗옷이라 하는 것도 때가 주주리 낀 데다가 콧물조차 조르르 흐르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비렁뱅이이올시다. 다들 놀라서
『지금 그가 누굽니까. 본래부터 아셨습니까.』
『모른다.』
『만금 돈을 팔면 부지 모르는 남을 주시며 그 성명도 묻지 않으시니 어쩐 일이십니까.』
『너희들이 어찌 알겠니. 대체 남에게 무엇을 달라는 사람은 먼저 제 믿음을 보이려고 반듯이 떠벌리는 법이요 또 낯빛이 수줍고 말을 더듬는 법이다. 그런데 이는 보매 옷은 허술하여도 말이 간단하고 티가 점잖으며 얼굴에 수줍은 기운이 없고 아무것 없어도 넉넉한 사람이다. 그가 나를 믿고 왔으니 나도 그를 믿고 준 것이다. 아니 주면 모르거니와 이미 준 바에야 성명은 알아 무엇하겠니.』
하였습니다.

◇ 만금에 흔들이는 나라의 주제


허생원은 이렇게 만금을 얻어 가지고 그 길로 집에도 들르지 않고 경기 충청 두 도의 어금이요, 삼남에 목쟁이 되는 안성에를 갔습니다. 거기다 자리를 잡고는 앉아서 밤, 대추, 배, 감, 유자, 석류 따위 과실을 값을 갑절씩 주고 사들였습니다. 허생원이 과실을 다 거래한 뒤에는 온 나라에서 잔치도 할 수 없고 제사도 지낼 수 없습니다. 얼마 있더니 허생원에게 팔던 장사들이 값을 열갑절씩 내면서 다투어 가삽니다. 허생원은 한숨을 쉬며 하는 말이
『만금을 써보니 나라와 주제를 알겠다.』하고 다시 쇠붙이(金屬)그릇과 필육, 솜, 실을 사 가지고 제주로 가서 말총과 도거리하며 하되
『몇 해가 아니면 모두들 머리를 거두지 못하리라.』
하더니 과연 얼마 아니 가서 망건 값이 열 갑절씩 올랐습니다.

◇ 도적도 아내 있고 집 있고 농사지으면 양민

이렇게 두 번 시험에 큰돈을 모으고 조선 안에서는 하잘 것이 없다 하야 늙은 뱃사람에게 물어서 동남으로 여러 천리 밖 바다 위에 빈 섬이 많이 있는 것을 알고 삯을 많이 주고 그 뱃사람을 데리고 바람을 따라 여러 날만에 그곳에 다다라 보니 섬은 많아도 큰 섬은 하나도 없습니다. 높은 데 올라가서 내려다보고 매우 섭섭하야 하되
『이까짓 졸대기 섬에 무슨 큰 놀음을 하겠니. 땅이 걸고 볕이 뜨겁고 샘이 많고 나는 것이 많으니 부자노릇이나 하자면 하겠다.』
하고 찐덥지 못하여 도로 나왔습니다.
이때에 해변 고을에 도적 떼가 수천이나 되니까 여러 고을에서 토포(지금으로 치면 순사)를 풀어서 잡으랴 하야도 잡히지 안습니다. 그러나 도적들도 잡힐까 보아서 감히 나와 도적질도 못하는 까닭에 꼭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허생원이 도적의 속에 들여가서 도적의 우두머리를 보고
『너희 천 사람이 천금을 빼앗으면 한 사람 앞에 얼마나 돌아가느냐.』
『한 사람 앞에 한 냥씩이올시다.』
『너희들은 아내가 있느냐.』
『없습니다.』
『논밭이 있느냐.』
도적들이 웃으며 하는 말이
『아내가 있고 논밭이 있으면 무슨 일로 도적질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왜 장가를 들어서 집을 지니고 소를 매고 농사를 짓지 않느냐. 그러면 도적이란 이름도 없고 마음대로 다녀서 붙들릴 염려도 없겠고 넉넉하고 편안하게 살터인데.』
뭇도적들이 일시에
『누구는 그것 싫어서 아니 합니까. 돈이 없어 그러지요.』
허생원이 웃으면서
『너희들이 도적질을 하면서 돈 없는 걱정을 하니? 내 너희들을 위해서 도리를 차려주마. 내일 바다 위에 붉은 기를 날리는 배가 있을 것이다. 그 배는 다 돈배니 너희이 와서 마음대로 가져가거라.』
허생원이 도적들과 약속을 하고 가니 뭇도적들이 다 미친 사람으로 알고 웃다가 그 이튿날 바다에 나가보니 과연 허생원이 배에 여러 십만금을 싣고 있습니다. 다들 놀라서 나붓이 절들을 하며
『그저 하라시는 대로하겠습니다.』합니다. 허생원은
『너희 힘껏들 가져가거라.』하니 뭇도적이 다투어 돈을 져 가는데 한사람이 백금에 지나지 못 합니다. 허생원이 이것을 보고
『너희들이 백금도 지지 못하는 주제니 무슨 도적질인들 제법 하겠니. 인제 너희들이 비록 양민이 되려 하야도 이름이 도적놈 치부에 올랐으니 어데 가 용납을 하겠니. 내 여기서 기다릴 것이니 각각 백금을 가지고가서 하나가 계집 하나와 소 한필 씩을 얻어가지고 오너라.』
하였습니다. 뭇도적이 그리하오리다하고 다 헤어져 갔습니다. 허생원은 혼자 이천사람의 일년양식을 준비하야가지고 기다리고 있으니 뭇도적이 하나도 안 떨어지고 여러 배를 빌려 타고 미리 보아둔 외딴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허생원이 도적을 도거리한 뒤에는 나라에 도적걱정이 없어졌습니다.(또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