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2호
<사담>

서은왕 이야기 - 중국 천하를 쥐고 흔들던 우리 서은왕(徐偃王)의 위엄

조규수


요사이 중국에 난리가 나서 장작림(張作霖)의 군사와 손전방(孫傳芳)의 군사가 서주(徐州)에서 서로 싸워 이기고 지기를 내기하였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그 서주는 우리 조선의 지난 역사가 있는 곳이올시다. 이왕에 우리가 우리 역사를 읽을 때에 안목이 어찌 좁았던지 우리 겨레의 나라나 우리 겨레의 사적도 남의 나라 남의 일로 알기를 곧잘 했던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문을 읽다가 서주라는 땅 이름이 있으면 ‘이것은 하우(夏禹)씨 때 아홉 고을의 하나이거니!’ 하거나 또는 ‘그 땅의 동편에는 초패왕 항적(楚覇王項籍)이 도읍 하였던 팽성(彭城)이 있고 서편에는 한나라 한신(韓信)이 십면매복(十面埋伏)하였던 해하(垓下)와 장량(張良)이 옥퉁소 불던 구리산(九里山)이 있어 초한(楚漢) 전쟁의 마지막 싸움이 크던 곳이 이곳이거니!’ 할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곳에 나라 하나가 있어서 천년 동안의 긴 역사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한족(中國 漢族)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조선) 겨레의 나라였습니다. 중국의 옛 역사를 보다가 서융(西戎)이라고 쓴 것이 있으면 한족 가운데 하나이거니 하였지만 실상은 우리 겨레 가운데 서예(徐濊)라 하는 것으로 서(徐)나라를 그곳에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옛날 우리 겨레 가운데 예(濊)라 하는 겨레가 있었고 또 그 겨레 가운데 눈강(嫩江, 지금의 吉林)가에 있는 한예(寒濊)와 동해의 남쪽에 있는 동예(東濊, 지금의 江陵)와 북쪽에 있는 불내예(不耐濊, 지금의 威興)와 양자강가에 있는 서예의 네 파로 나뉘었는데, 서예라 하는 것이 곧 지금 말하게 된 서나라 올시다. 우리 겨레 중 예의 한파가 그곳으로 가서 나라를 세운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단군께서 나라를 세우신 뒤 8,900년 때에 우리 겨레 가운데는 적은 나라가 여럿이 있어서 서로 다투기도 하고 또 그 폭원이 좁기도 함으로 그때 예의 한 임금이 멀고 큰 뜻을 두어 판 밖으로 나갈 것을 생각하던 차에 마침 중국 은(殷)나라의 소을(小乙)이라 하는 임금이 어두워서 그 나라의 운수가 쇠잔한지라 이것을 본 예의 한 임금이 여러 무리를 거느리고 중국을 들어가서 살기 좋은 땅을 차지하고 보니 강(江)과 회(淮)의 두 큰물이 남북으로 막고 있고 산과 들이 고르게 된 서주 부근이 그 중에 마땅함으로 덮어놓고 그곳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으나 한족(漢族)들은 그때에 한참 잔약하야 그것을 막지 못했고 그 뒤를 이어서 우리 겨레가 점점 그 근처로 옮겨가며 또 번성하여 발해 남쪽(지금의 山東省)으로부터 양자강 북쪽까지 퍼져 살게 되니 남의 이름을 쫓아가면서 고약하게만 부르는 한족의 버릇으로 우이(?夷), 래이(萊夷), 회이(淮夷), 서이(徐夷)라고 하였습니다.('이'라는 것은 오랑캐입니다) 이같이 5,600년을 지나서 우리 서나라의 국운이 더욱 창성하니 양자강 북편으로 회수(淮水), 사수(泗水) 사이가 모두 서나라의 강토가 되고 그때 임금인 서은왕(徐偃王)의 착한 덕이 사방에 미쳐서 한족의 모든 나라도 돌아와서 항복하는 곳이 50여 나라가 더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나라의 위엄이 멀리 뻗치게 되니 한족 가운데서 중국의 주인이 된다는 주(周)나라에서 크게 근심하다가 나중에는 싸워보기로 결심하고 그 나라에 붙은 모든 작은 나라와 합하여 우리 서나라에 붙은 나라를 먼저 쳤습니다. 이것을 본 서나라 은왕은 내 나라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를 주나라가 치는 것을 그대로 두면 그들 불쌍한 백성들의 생명이 어찌되며 그까짓 중국 놈들의 주제넘은 버릇을 기르게 된다 하여 발연이 일어나는 노염으로 은왕이 몸소 나서서 큰 군사를 거느리고 주나라 군사를 냅다 쳐서 황하(黃河)수까지 이르니 주나라 백성들이 크게 소동하여 어찌할 줄을 모를 뿐만 아니라 주나라의 형세가 위태하게 되었습니다. 자는 호랑이의 코를 찌른 것과 같이 서나라의 쳐들어오는 것을 도리어 받게 된 주나라 임금 목왕(穆王)은 크게 두려워하여 싸움이 그치기를 간절히 빌면서 동편은 서나라가 주장하고 서편은 주나라가 주장하자는 조건을 들어서 싸우지 않기로 맹서하여 간신히 평화가 되었으니 이것은 우리 겨레가 밖에 나아가서 활동하던 큰 사실이요, 우리와 한족 사이에 큰 기록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서나라와 주나라 사이에 평화는 되었으나 그래도 소위 중국의 천자로 사방에 제후를 거느리고 있다는 주나라의 자존심으로 서나라에 평화를 빈 것을 항상 마음에 부끄러워하여 그 분풀이를 하여볼까 하고 그 뒤에 주 선왕(周宣王) 때에도 우리 서나라를 침범한 일이 있었으나 뜻과 같지 못하였고 서나라는 더욱 강성하여 황하수 근처까지 차지하고 도읍을 랑야(琅야, 지금의 山東省)에 옮기었습니다. 그 후 단군기원 1796년경에 초(楚)나라와 싸우다가 불행히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나라가 없어지고 그 인민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다시 일어나기를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터만 남아 한족의 강역이 되어 오늘까지 서주라 하는 이름을 이어오니 서주라는 말을 할 때에는 그 기억이 새로운 것이올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지금 중국의 강소(江蘇), 안휘(安徽), 산동(山東)의 그 넓은 구역은 모두 우리의 터전으로 된 식민지이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활동하던 그곳을 오늘날 우리가 지나면 옛 생각이 어떠할까요. 중국 당조(唐朝) 문장 두보(杜甫)가 서주성에 올라서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이라고 읊조리던 글귀를 우리의 말로 풀어서 ‘나라는 없어졌어도 산하는 남아있구나…… 빈 성에 봄이 왔는데 초목만 우거졌도다.’ 하는 뜻으로 다시 옮겨 보면 한족의 글 하는 사람으로도 그곳에 슬픈 회포를 내이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우리로서는 그 글귀를 읽을 때 누구의 자취인 것도 순전히 모르다시피 하였으니 참으로 가엾은 일이라 아니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