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1호
<사담>

사법명대장군 - 천하의 강적 위(魏)나라의 이 십만 대군을 물리친 사법명대장군

조규수


이 이야기는 지난 달 10월호에 양만춘 장군의 이야기를 하다가 양만춘 장군의 안시 싸움과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 싸움과 백제의 진평 싸움은 우리 역사상에 세 가지 큰 싸움이라 한 그 가운데의 하나인 진평 싸움의 주인공 사법(沙法)명 장군의 이야기인데 진평의 싸움은 고사하고 사법명이라는 사람만 우리 옛적에 있었다 하는 말만 들어도 처음이라 할 뿐더러 없는 거짓말을 한다고 성을 낼 사람도 있겠지마는 참말로 백제 때에 계셨던 어른입니다. 백제 때에 사(沙)라 하는 성은 해(?) 연(燕) 조(?) 진(眞) 국(國) 목(木) 묘(苗)의 여러 성과 한 가지 그 때의 여덟 큰 성으로 백제의 장상(將相)이 되었었음으로 사법명 장군도 그와 같이 대대로 높은 벼슬을 이어 그 나라의 이름난 장수가 되었다가 그와 같은 큰 싸움에 공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을지문덕의 살수싸움보다 122년 양만춘의 안시 싸움보다 145년이 먼저이니까 사법명의 이야기가 먼저 있었을 것이나 우연한 생각의 선후가 없음을 인연하야 이제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가 자세하지 못한 탓으로 이왕에는 아는 이가 드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자니까 그 때 백제 나라의 형세가 어떠하든 것을 먼저 말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당치 못한 말이라 할 듯함으로 그것을 먼저 말씀하겠습니다.
우리 조선 나라의 이왕 삼국시대 판도(版圖)를 말하면 누구든지 백제는 한강 남쪽으로 지금의 충청, 전라남북 등 도에만 그친 것으로 알지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 황해, 발해를 건너서 중국 요서, 진평의 두 고을 곧 지금의 봉천성, 요하 서편으로 직예성, 난주부(?州), 난하(?河)에까지 이르고 장성을 넘어 지금 내몽고의 렬하(熱河)까지 이르는 그 넓은 지방을 모두 차지하였으므로 그 때 진평군은 곧 지금의 영평현인 까닭에 중국과 국경이 서로 연하야서 중국으로 더불어 끊임이 없는 모든 싸움의 교전 구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중국의 정황으로 말하면 중국의 주인이라 하는 한족의 운수가 쇠잔 하야 한족으로 이룬 나라의 정부는 중국의 한쪽 곧 양자강 남편에 있어서 아침에 일어났다가 저녁에 없어지는 육조시대이므로 그 때에도 소도성(蕭道成)의 제(薺)나라라 하는 나라가 있어서 정권을 서로 빼앗기에 아무 정신이 없이 쇠잔한 목숨을 간신히 보전할 뿐이요, 그 나머지 북쪽의 넓은 중원은 선비(鮮卑), 흉로(匈奴), 갈(?), 강(羌), 저(?), 강(羌) 등 여러 겨레들이 서로 일어나서 연(燕), 진(秦), 양(凉), 조(趙), 하(夏)의 모든 나라를 세워서 그의 세력 경쟁이 맹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에 선비의 겨레 되는 척발(拓跋)씨가 색두부(索頭部)라 하는 지방에서 처음 일어나서 그 겨레가 번성할수록 중국의 강역을 빼앗아 그 세력을 확장하다가 척발규(拓跋珪)라 하는 사람의 때에 와서는 평성(지금의 산서성 대동부)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의 이름을 위(魏)라 하니 이것이 곧 후위도무제(後魏道武帝)라 하는 임금이오, 그 뒤에 자손이 대대로 그의 뜻을 이어서 조업을 널리는 것으로 그 나라의 운명을 융성케하니 그 뒤 일곱째 되는 임금 효문제굉(孝文帝宏)의 때에 이르러서는 유연(柔然, 지금의 수원(綏遠)) 북연(北燕, 지금의 直*) 북양(北凉, 지금의 협서(浹西)) 하(夏, 지금의 감숙(甘肅)) 토곡혼(吐谷渾, 지금의 청서장해(靑西藏海))의 모든 나라와 부족을 쳐서 항복 받고 그 넓은 지경을 모두 차지하여 강대한 나라를 만들어 여러 한족에 끼친 백성을 모두 압제하여 종놈같이 부리고 황하를 건너 장강의 유역까지 사나운 말굽으로 짓밟아 강남에서 겨우 이어가는 한족의 나라인 송(宋)과 제(齊)의 틈을 엿보니 중국의 황하 남북에서는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할 만치 호기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으나 발발한 야심이 동쪽으로 유주의 빈 들을 또 마저 개척하야 볼까한즉 조선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의 모진 화살과 긴 채찍이 두려운 가운데도 더욱이 백제는 그때에 마침 유주와 땅이 서로 붙은 진평을 차지하야 갈 때 줄기 많은 란하(?河)로 경계를 삼고 그 동편에는 딴 나라 사람의 목소리도 건너오지 못하게 할 뿐더러 걸핏하면 날카로운 칼날을 뽐내어 유기(幽?)의 요새를 깨치고 들어오는 것이 사람 없는 집안을 휩쓸 듯이 하니 그 소위 사방 경영에 적지 않은 방해라 그리 하야 세상을 엎을 듯한 위효문제(魏孝文帝)의 그 위풍으로 큰 용단을 내어서 지혜 많기로 유명한 최후의 전략을 빌어 가지고 대삭(代朔)의 용진한 군사 이십 여만을 움직이어 유기들을 호호 탕탕하게 지나서 가민이란 하를 건너 진평의 지경을 음습하니 이 때에 백제에서는 뜻밖에 그 난리를 만난 것이지마는 멀리 바다를 건너가서 넓은 지방을 점령한 터에 지혜가 깊은 장수도 많고 훈련이 익숙한 군사도 많음으로 터럭만치라도 겁낼 것이 없어서 그 급보가 백제의 정부에 이르는 즉시에 우리 명장 정로장군(征虜將軍) 사법명 어른으로 총지휘 책임을 맡기고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라(木干那) 세 병장으로 도와서 대적케 하니 사법명의 호령이 군사 가운데에 떨어지는 그 당장에 우리 이름 높은 백제의 군사의 기운이 산악을 흔드는 듯이 솟아나서 칼날을 사귄지 얼마가 못 되어 위 나라 군사의 주검이 들에 늘비하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어 해를 가리던 위나라의 깃발이 그림자도 볼 수 없게 되는 끝에 이십 여만의 군사가 다 죽고 몇몇의 나머지는 오던 길을 찾지 못하야 수풀에서 풍긴 새떼 같이 발해 언덕 밭고랑 사이에 헤어져서 목숨을 갖추기에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그 위나라도 감히 조선 침략책은 마음도 두지 못하게 되어 그 뒤에 백년을 지나서 동서의 두 위 나라가 다 없어지도록 동쪽은 감히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굳세인 것으로써 ‘빼지’라는 이름을 얻은 백제의 국력도 강성하였지마는 사법명의 신기한 전략이 그와 같은 큰 공을 이룬 것은 그 때 백제 임금의 표창하는 글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올시다. 이 때는 백제 동성왕 11년 경오(庚午), 후위효문제태화 14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436년 전의 일이올시다. 우리 나라와 중국이 서로 연하야 있는 국경에서 싸운 것으로는 살수 싸움과 안시 싸움밖에 그만치 큰 것이 없고 그러한 큰 싸움의 사실을 그에 뒤 아는 이가 드물기에 헤어진 기록을 모아서 대강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