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0호
<사담>

천하영웅 당 태종의 눈을 쏘아 쫓은 양만춘 장군

조규수



조선 역사 중에 제일 장쾌하고 신나는 페이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중국 수나라 큰 병사(대군)를 무찔러 쫓은 이야기를 여러분은 요전번 <어린이 9월호>에서 읽으셨으니까 아직 잊어버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때 200만명이라고 하는 큰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살수 싸움에 을지문덕에게 패하야 간신히간신히 2천여 명의 나머지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도망하야 들어간 수나라 임금 수양제가 사람들의 원망은 돌보지 않고 계집질과 음탕한 장난만 여전히 하매 그 때에 벼슬하는 이연(李淵)의 아들 세민이 영특한 인물이라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군사를 일으켜 수양제를 무찔러 죽이고 자기가 스스로 중국의 임금(진명왕)이라 자처하야 내뻗는 기세로 군사를 몰아서 서북으로 돌궐, 토번들의 겨레를 무찌르고 중국 온통을 차지하야 당나라의 태종 황제가 되니 그 위엄이 천하를 흔들고 그 기세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동쪽으로 조선의 고구려가 있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고구려는 그 때 지금의 남북 만주 큰 벌판과 러시아 지역까지 차지하고 백성들이 어찌 강하던지 감히 가까이 올 수 없을 뿐 아니라 수양제의 아버지 적부터 정벌하러 갔다가는 패하고 쫓겨 오고 갔다가는 쫓겨 오고 하다가 수양제 때에는 을지문덕에게 행적도 없이 아주 패망하야 온지라 자기 나라 백성이 임금보다도 더 고구려 사람을 무서워하고 어린아이까지라도 '커수원(고구려 장수라는 말)'이라 하면 울음을 그치는 등 그렇게 겁내는 때였습니다.
그래 당 태종 이세민이 항상 마음에 그것을 앙앙히 알고 있어 어느 때던지 고구려를 무찔러 후환을 없이하고 자기와 자기 나라의 위엄을 떨치리라 하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 태종 이세민이 원래 영특한 인물이라 이 싸움 저 싸움에 힘을 얻고 기세를 길러 가는 곳에 거치는 것이 없고 닿는 곳에 물리치지 못함이 없어 중국 그 큰 덩어리가 모두 그 앞에 굴복하야 호령을 쫓는지라 하늘을 찌를 기세로 동편을 흘기며
"이제야 그까짓 고구려를 못 치랴."
하고 고구려를 무찌르려 하니 그럴 때마다 신하 위증(魏徵)이 간하야
"고구려는 비할 데 없는 강한 나라이라 용맹한 장수가 많고 또 백성이 다 충용이 대단하야 치다가는 반드시 패만 보고 올 것이오니 아직 더 시기를 기다리소서."
하고 말리고 말리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증이는 죽고 그 후로 당나라 형체가 점점 더 커진지라 태종이 기세가 충천하야
"이제는 고구려도 힘이 쇠하였을 것이니 내가 한숨에 무찌르지 못할 것이랴. 수나라 때에 네 번이나 나가서 모두 패하고 들어왔으니 중국의 자제들을 위하야 내가 그 원수를 갚겠노라."
하고 고구려 정벌을 명령하매 호령이 떨어지는 즉시에 날랜 군사 10만3천명이 4,5천리밖에 있는 고구려를 향하야 진군하니 때는 지금으로부터 꼭 1281년 전이었습니다.
당나라 서울 즉 지금 협서성 서안부 함양현으로부터 출발하야 하락(河洛)의 거듭한 물을 건너며 유소(幽蘇)의 지리한 길을 달리어(이세적 장량 등 명장으로 지휘하야) 한때는 등래(登萊)에서 발해(渤海)를 건너 백암성 아래에 내리게 하고 한 대는 육지로 늠하를 건너 유관(지금의 중국 산해관)을 나와서 고구려의 서울인 평양(지금 개평)을 가리키며 고구려 전경을 쓸어버리려 덤비니 천하의 정병 이세민의 10만3천은 요동의 평야를 휩쓸며 덤볐습니다.
중국 천하의 모든 기세가 오로지 고구려로 밀려드는 형세에 고구려는 한숨에 휩쓸릴 것 같았으나 그러나 우리 고구려에는 이름 높은 장수와 꾀 많은 신하가 헤일 수 없이 많이 있어 조금도 그야말로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때 고구려의 서쪽(중국 가까운 편)을 막아 있는 책임을 맡아 안시성(지금의 규천생 개평현탕타지보)의 성주(즉 수장)가 되어 있는 이가 양만춘 장군이었는데 10만3천의 대군이 에워싸고 덤벼드는 것을 보고
"여기에 지키고 있는 군사가 비록 수효는 얼마 안 될망정 어찌 내가 저까짓 당병을 십만 아니야 백만 명이기로 내 힘으로 막지 못하고 서울에까지 보하야 위로 황제께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 장수 여러분의 수고로움을 끼치겠느냐. 우리는 마땅히 이때에 우리의 힘을 시험하자!"
하고 대담하게도 자기 단독으로 얼마 안 되는 수비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성밖에 철통 같이 에워싸고 몰려드는 당병을 막아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양만춘 장군은 싸움하는 꾀도 많았거니와 용맹하기 한이 없었고 또 그 부하 군사가 전술이 기묘하여 능히 그 큰 군사를 대항하야 싸웠습니다. 그러나 원래 수효 적은 수비군이라 싸움을 오래 끌면 도저히 당하기 어려울 것을 알고 양만춘 장군이 얼른 한 꾀를 내여 스스로 성벽 위에 나서서 십리밖에 버들잎이라도 맞춘다는 귀신같은 솜씨로 활을 재어 성밖에 10만3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풍우 같이 몰아들어 오는 천하의 영웅 당 태종을 얼굴을 향하야 쏘았습니다.
누구의 활이라고 아니 맞겠습니까. 총알 같이 튀어 나간 양만춘 장군의 화살은 당 태종의 왼편 눈을 보기 좋게 들이찔렀습니다.
'아차차.'
부르짖으면서 누가 볼까 겁내어 급히 말을 돌려 바람 같이 도망하였습니다.
하늘 같이 귀신 같이 믿고 있던 태종 황제가 도망하는 것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진이 어지러워지는 틈을 타서 우리 고구려의 수비군은 양 장군의 호령대로 일시에 함성을 치면서 내여 무찌르니 장수를 잃어버린 군사들이 마른 풀 같이 칼끝에 베어지고 간신히 남은 놈이 구름 같이 흩어져 도망하는지라 뒤를 따르며 닿는 대로 베이니 간신히 살아 도망하야 당 태조의 뒤를 따른 놈이 불과 2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급급히 도망하느라고 왔던 길을 잃고 산중으로 헤매어들어 주린 배를 안고 추위에 떨게 되니 그 적에야 당 태종 이세민이
"죽은 위증이가 말리던 말을 들었으면……."
하고 후회의 눈물을 지었습니다.
이리하야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는 조선을 침범할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안시성 승전인데 백제가 진평 땅에서 위나라 군사 수십만 명을 무찌른 싸움과 또 을지문덕의 살수싸움과 합하야 조선 역사에 유명한 세 가지 싸움 중의 하나이니 그 때는 우리(한검)의 건국 기원 2,987년(을사)이요 고구려 보장왕 2년 때의 일입니다.
겨우 한 변경의 수비군으로 뜻밖에 몰려드는 십만 대적을 외로이 막아 그같이 용맹하게 물리치어 나라로 하여금 아무 걱정이 없게 하고 동포로 하여금 적군의 말굽에 밟힘이 없게 한 양만춘 장군과 그 군사의 용맹은 우리들의 길이길이 잊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딴 말이지만 한마디 할 것은 그 때에 당 태종 이세민의 부하에 있는 큰 장수 중에 설인귀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본래 우리나라 사람인데 당나라에 가서 높은 벼슬을 하며 믿음을 받아서 고구려를 치러 올 때도 통솔자가 되어 자기의 부모의 나라를 자기의 손으로 치러 나왔으니 그가 어떻게 더럽고 흉하고 괴악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줄 모르고 설인귀 설인귀 하면서 그의 용맹을 칭찬하다 못하야 그가 전에 말달리던 곳을 설마치라고 기념하는 땅 이름까지 지금도 경기도 연천군 경내 옛 적성 땅에 있으니 우습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정작 양만춘 장군은 어느 때 어디 있었든 사람인지 그가 당나라 대병을 물리치든 안시성이 어디인지도 자세 아는 이가 드무니 이보다 어리석고 섭섭하고 부끄러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우리의 역사를 모르는 이가 하도 많아서 두어 말씀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