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6호
<사담(史談) ><역사>

을지문덕

김재희



반만년 역사를 가진 우리 조선에는 영웅과 위인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어른들 중에 자세한 사적의 기록이 없으므로 무명된 이도 많지마는 지명한 인물 중에도 세계적 인물이라고 할 만한 이는 얼마 안 된다.
을지문덕 님은 우리 조선 반만년에 큰 영웅이고 육군에 제일 되는 위인이다. 조선의 위인뿐 아니라 실로 세계적 위인이다. 문덕님의 장하고 훌륭한 사업은 조선에서만 그 짝이 없을뿐 아니라 세계 역사 위에도 짝이 없는 인물이다. 나폴레옹이 장하다 하나 그는 실패자가 되고, 알렉산더가 장하다 하나 그도 실패자이요, 카이제루도 장하다 하나 역시 실패한 자이다. 문덕 님과 짝이될만한 2,3인은 다 실패하였으나 오직 문덕 님은 성공자이고 승리자이다. 이 점으로 보면 우리 문덕 님은 실로 세계에 다시없는 위인이다.
을지문덕 님은 지금부터 1324년 전 고구려 영양왕 때 어른이다. 고구려 서울 평양성으로부터 서로 80리 되는, 석다산(지금 평남 강서군에 있음)에서 나셨다. 문덕 님은 집이 매우 가난하여 소년 시대에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없으므로 석다산 굴속에서 공부를 하셨다는 전설이 있다.
문덕 님의 풍신은 웅장하고, 얼굴은 미인 같이 고우시고 큰 지혜가 있었으며 속문과 시를 잘 지으시고 말 잘 타고 활 잘 쏘고 큰 외교가요 큰 도덕가이고 임금을 도와 천하를 태평케하던 대정치가이고 전장에 나가 무공을 세계에 빛내던 큰 군인이다.
이대 고구려 서울 평양은 인구가 수백만이요, 화려하고 굉장하기가 세계에 제일이다. 나라는 부강하고 하고 백성은 태평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평원대왕은 군기를 더욱 정돈하고 군량을 저축하고 백만 군사를 양성하야 만일의 후회가 없도록 늘 주의하셨다. 그것은 당시 지나에 수라 하는 큰 나라가 새로 일어나서 지나를 통일한 후에 그 세력이 매우 성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평원대왕은 만일의 근심을 예방키 위하여 깊이 주의하신 것이다. 1334년에 평원대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원』이 즉위하시는 곧 영양대왕이시다.
영양대왕께서 즉위하시자 우선 당시의 일인인 을지문덕 님을 청하야 대신(지금 총리대신)을 삼아 나라 일을 맡기시고 어질고 착한 정사를 베풀어 인민을 사랑하니 국태민안하야 백성이 대왕과 문덕을 부모 같이 사랑하였다.
이때 수의 임금 양견이 지나를 통일 한 후에 항상 동으로 고구려에 야심을 두고 평원왕 때부터 양견이 혹은 사신을 보내 우리에게 쓸데없는 말도 하여 보고 혹은 꾀를 내어 우리의 세력을 들고져 하였다. 오랫동안 우리에게 부속되었던 말갈 거란을 달래 우리를 저버리고 수에게 붙게 하였다. 말갈, 거란이 그의 꾀에 빠짐을 알고 평원대왕이 노하야 말갈과 거란을 꾸짖어 수에게 통치 못하게 하시고 또 이때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압박을 두려워하여 수를 권하여 고구려를 치라 함으로 평원왕이 대노하야 백제와 신라를 정벌하셨다.
이때 영양대왕이 천하 형편을 살펴보시니 여러 나라 중에도 노직 수가 고구려의 큰 적이다. 수가 고구려와 같이 천하대세를 다투니 수가 망하지 않으면 고구려가 편치 못할 것이다. 대왕은 먼저 수를 치기로 작정하시고 1366년 전에 대왕께서 친히 수를 치게 되셨다. 이때 장졸들은 용맹스럽게도 앞을 다투고 인민들은 힘을 다하야 나라를 돕는지라. 대왕께서 말갈병 만여명을 몰아 앞세우고 수를 쳐들어가시니 수주 양견이 크게 겁이 나서 양양으로 하여금 30만 대병을 거느리고 우리 군사를 맞아 육군은 임**(지금 중국 산해벌)으로 들어오고 수군은 동맥(지금 중국 산동성)으로 들어오거늘 우리 군사는 용맹스럽게 수군을 역격하니 적이 크게 패한 중에 육군은 괴질병에 걸리고 수군은 복선을 당하야 적군의 죽은 자가 10의 8,9나 되었다. 나머지 적국은 다 도망하여 돌아갔으므로 우리 군사는 승전고를 울리고 돌아왔다. 그 후에 수주 양견이 죽고 그 아들 양광(수양제)이 임금이 되어 남으로 임읍(지금 안남)을 평정하고 북으로 돌궐(지금 몽고)을 항복받고 서로 서역 30여 나라의 조공을 받으매 그의 위엄이 크게 나게 되었다. 이때에 오직 고구려가 강성하야 수와 대적이 되니 수양군이 이것을 근심하며 1311년 전 2월에 장사 644인, 육군 113만3800인, 수군 700만인, 해륜병 150만인, 전마 20만필, 병차 500승, 병선 300쌍을 고구려로 입침하게 하니 그 군세의 장함이 유사 후에 처음이다.
1312년 정월에 수주가 300만 대병을 거느리고 동으로 들어오니 깃발이 1040리에 뻗쳤다. 적이 요수에 이르매 영양대왕이 여러 장수를 명하야 적을 맞아 크게 싸웠다. 적이 요수를 건너 요양성(지금 만주 요양)을 들리거늘 여러 장수가 힘을 다하야 6월까지 굳게 지키고 수의 수군대장 내호아는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지금 지나 산동성)해로부터 패수(지금 평양 대동강)을 건너 평양에 이르렀거늘 대왕의 아우 무건이 평양성 내에 복병을 시키고 적을 맞아 싸워 거짓 패하여 달아나다가 복병을 발하야 적을 쳐 크게 파하니 이때 적의 수군이 살아간 자 수천인에 지나지 못하였다.
적의 수군은 함몰시켰으나 육군은 대장 우문술이 여러 군사를 합하야 압록강 서쪽으로 모여들거늘 영양대왕이 을지문덕을 보내 거짓 화친을 청하니 이것은 육군의 내용을 알고자 함이다. 수주가 대장 우중문에게 문덕이 오거든 잡으라고 명령하였다.
문덕 님이 수군에 이르니 수대장 우중문 우문술 등이 있고 그 중에 소위 접빈사 유사룡이라 하는 자도 있었다. 유사룡이 문덕을 대하여 보매 문덕 님이 외교상에 훌륭한 수단을 써서 그의 마음을 감동케 하니 사룡이 황공감격하여 깊이 문덕 님에게 심복하였다. 우중문과 문술들도 문덕님의 늠름한 위풍에 놀래었다. 이때에 우중문이 문덕 님을 잡아죽이자 하였으나 사룡은 죽이지 말자고 만류하였다. 문덕 님의 위풍에 놀란 우문도 감히 잡지 못하였다. 문덕 님이 수군의 내용을 자세히 알고 곧 본영으로 돌아오니 우문이 문덕 님을 보내고 후회하여 곧 사람을 급히 보내 다시 상의할 일이 있으니 잠깐 다시 오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이때 문덕 님은 벌써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는 중이다. 문덕 님은 뒤를 돌아보지도 아니 하고 빨리 돌아왔다. 중문과 문술은 다시 대병을 거느리고 문덕 님을 쫓아왔다. 문덕 님은 수군의 주린 빛이 있음을 보고 더욱 피곤케 하기 위하야 1일 동안 일곱 번 싸우다가 일곱 번 지는 체 하고 거짓 달아나니 적은 점점 문덕 님의 뒤를 따라서 평양의 서쪽 30리 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때 적은 피곤이 막심한 중이다. 더욱 평양성의 지킴이 굳건함을 보고 겁이 나서 도망코자 할 때에 문덕 님은 정병을 호령하야 사방으로 쳐들어갔다. 적이 도망하여 7월에 살수(지금 안주 청천강)에 이르러 (2월호 독자 문단에 이재호 씨 칠불사 전설을 보시오) 서로 다투어 강을 건너고자 할 때에 물이 깊어서 능히 건너지 못하고 반은 수중에 빠지고 반은 강가에 있는 중이다. 이때 문덕 님이 정병을 몰아 일시에 급히 쳐들어가니 적인 강중으로 막 뛰어들어 반은 어복에 영장이 되고 반은 칼머리에 귀신이 되었다. 청주강물이 흐르지 못하리 만큼 적의 전부가 거진 다 죽었다. 처음 압록강 서쪽에 30만5천이나 모였던 적병이 살수대전에 살아 돌아간 것이 2천700인 밖에 안 되었다.
수주가 전후에 수십여 나라를 쳐 항복 받아도 실패한 일은 별로 없었다. 고구려에게 대패를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을지문덕 님을 잡지 못한 것은 수주의 평생의 한이다. 수주가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즉시 유사룡을 베어 그 머리를 나라 안에 돌렸다.
수주는 그 뒤에 고구려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네 번이나 대병을 들어 우리를 침노하였다. 그러나 한번도 승리치 못하고 네 번이나 다 대패를 당하였다. 국세는 점점 약하여지고 인심은 수주를 배반하야 큰 난리가 일어나서 필경 수는 멸망하고 고구려는 유사 이후에 제일 되는 큰 전장에 대 승리를 얻어 나라 위엄이 사방에 진동하였다. 이것은 전혀 을지문덕 님의 공이다.
을지문덕님의 살수대전은 실로 세계 일의 큰 승리이다. 유사 이후에 처음 되는 승리이다. 이 싸움에 승리자는 을지문덕님이다. 을지문덕 님은 실로 세계적 큰 위인이다.
을지문덕 님의 묘는 지금 평양의 서남으로 20리 되는 대보산에 있다 한다. 그러나 미상하다. 을지문덕 님의 후손의 성은 돈(頓)씨이라고 한다. 지금 평양부근에 돈씨가 있는데 을지문덕 님의 후손이라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