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호
<역사담><역사>

문익점 선생

신명균



여러분! 여러분 중에는 명주옷을 입은 이도 계시겠고 간혹 양복을 입은 이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대개는 여러분의 바지저고리 두루마기기로부터 잘 적에 깔고 덥는 이부자리까지 무명 아닌 것이 없으리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것처럼 이 무명은 솜으로 실을 자아서 짜낸 것이올시다. 만일 오늘 이 솜과 문명이 없었을 것 같으면 우리는 얼마나 불편하며 또 춥게 지내겠습니까. 바로 얼어죽을 것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들겠지요. 이처럼 긴요한 솜과 문명이 지금으로부터 557년 전까지는 우리 조선과 저 중국에서는 그 이름도 몰랐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은 다만 모시 베 명주 같은 것으로 몸을 가리고 추위를 막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있는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명주옷을 입는다, 털옷을 입는다 하지마는 없는 사람들은 그도 저도 없이 엄동설한에 모시옷 베옷을 입고 떠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솜은 본래 따뜻한 지방에서 나는 식물이올시다. 그때 저 중국 남쪽 월남 교지라는 곳에 이 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지 토인들은 솜으로 무명을 짜 가지고 무명에 조개 무늬 난다고 해서 길패(吉貝)라고 했답니다. 중국서도 여기서 솜씨를 얻어다가 지금처럼 솜이 퍼진 것이라고 합니다.
저 거룩하신 문익점 선생님은 지금으로부터 593년 전 고려 충숙왕 때에 진주 강성현이란 곳에서 나셨습니다. 선생님은 천성이 어질고 자세할 뿐 아니라 또 굳세기로 유명하셨으며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셨습니다. 열두 살 되시던 해에는 저 고려 삼은이라는 이목은 선생님과 함께 글을 배우시고 서른 살 되시던 해에는 정포은 선생님과 함께 과거를 보셔서 급제를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볼래 성품이 곧으신 까닭에 바른 말씀을 잘 하시는 탓으로 늘 옥에를 갇히신다, 그렇지 않으면 귀양을 가신다 해도 어떻게 하면 나라를 위해 볼까, 어떻게 하면 동포를 위해 볼까 하는 생각은 잠시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서른세 살 되시던 해에 사신으로 중국에를 가셨다가 역시 바른 말씀을 하신 탓으로 교지로 귀양을 가시게 되셨습니다. 그랬다가 선생님 서른 여섯 살 되시던 해에 귀양이 풀려서 본국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중국 남경을 지나시다가 밭에 눈같이 하얀 꽃이 핀 것을 보시고 그때에 선생님을 모시고 오던 김용이를 시키셔서 그 꽃 하나를 따오라고 하셨습니다. 금용이가 밭에를 들어가서 그 꽃 한 개를 따 가지고 막 나오느라니까 어떤 할머니 하나가 따라오며 소리를 질러
『너는 어떤 나라 사람이길래 감히 우리나라 금물을 따 가느냐. 만일 관가에서 알면 너고 나고 둘이서 죄를 당하겠다. 어서 도로 내고 가거라.』
하며 첨에는 기고만장해서 제법 서슬 있게 쫓아오다가 문득 선생님의 점잖고 엄숙하신 모양을 뵙고는 할머니도 그만 풀이 죽어서 꾸물꾸물해지며 낮은 목소리로
『이것은 목화라는 것인데 우리나라에는 법이 엄해서 다른 나라에는 내보내질 못합니다. 당신께서 정 이것을 가지고 싶으시거든 깊이 깊이 감추어서 들키지 않도록 가져가십시오.』
합니다.
선생님은 그 할머니에게 목화 씨 몇 개를 얻으셔서 붓뚜껑 속에다 넣어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오시니 이것이 우리 조선에 목화가 들어온 시초올시다.
선생님은 이듬해 봄에 그 목화씨를 심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목화는 어떤 땅에 잘 되는지 몰라서 씨 몇 개는 마른 땅에다 심으시고 또 몇 개는 축축한 땅에다 심으셔서 온갖 공을 다 들여가며 기르시지마는 워낙 방법이 서툴러서 첨에는 좀 자라다가도 나중에는 그만 말라죽습니다. 이처럼 공을 들인 것이 첫 해에는 겨우 한 줄기가 살아서 간신히 씨만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온갖 고생을 다 겪고 3년째 되던 해에는 아주 훌쩍 잘 되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첨 보는 것이니까 이상해서 다투어가며 씨를 받아가기 때문에 목화는 차차 퍼져서 얼마 아니 되어 전국에 없는 곳이 없을 만치 되었지마는 이것을 무엇에다 써야할는지도 모를 뿐더러 솜을 만들 줄을 몰라서 손으로 씨만 뜯어 가지고 허투루 써 오다가 그때 마침 원나라 중 장이라는 사람이 우리 조선에를 왔다가 목화가 퍼진 것을 보고 남국 산물이 여기서 퍼진 것은 참 이상한 일이라 하고 선생님의 외삼촌 정천익 님 댁에서 묵으면서 목화씨를 바르는 「씨아」를 만들어서 솜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뒤로 이용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여 선생님 손자 문래 님은 실 잣는 수레 「물레」를 만들어서 실을 뽑아내게 하고 문영 님은 그 실로 베 짜는 법을 생각해 내니 세상 사람들이 그 어른의 공을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실 잣는 수레는 「물레」라 하고 베 짜는 법은 문영 님이 생각해 냈다고 해서 「문영(무명)」이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큰손자 문승로 님은 의성 원님으로 가서 밭 한 자리를 사 가지고 목화 심는 법을 가르쳐 준 까닭에 의성 목화는 지금까지 유명하다고 합니다.
선생님 예순 두 살되시던 해에 고려가 망하고 이조가 되니 선생님은 아홉 해 동안을 손님을 대하지 않으시며 대문 밖에를 나지 않으시다가 일흔살 되시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 조선에 이 문익점 님이 안 계셨던들 우리들은 이 추운 겨울에 모시 것, 베 것을 입고 벌벌 떨며 옹크라졌겠지요. 우리는 이 선생님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말 뿐 아니라 목화를 심고 물레를 두르며 무명을 짜서 그 선생님의 자취가 우리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선생님의 공덕을 갚는 것이요 또 우리들의 사는 길이 될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