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2호
<역사>

맹고불 맹정승

차상찬



세종대왕 때의 유명한 재상 맹고불(孟古佛)이라면 별로 모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본 이름은 사성이요 자는 성지니 충청도 온양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야 열 살 때에 능히 아들 된 도리를 다하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음식을 일주일이나 먹지 않고 극히 애통을 하며 장사를 지낸 뒤에는 또 산소에다가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그곳에서 치렀는데 꼭 죽만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 산소 앞에다 잣나무를 심고 날마다 정성스럽게 가꾸고 북돋아 주어 잘 자라게 하였더니 하루는 뜻밖에 몹쓸 놈의 동리 도야지가 와서 그 잣나무 뿌리를 쑤시고 물어뜯어서 나무가 말라죽게 하였습니다. 맹사성은 그것을 보고 퍽도 애처롭게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아이고 몹쓸 놈의 도야지 같으니…, 아무리 무지한 짐승이기로 남의 산소 앞에 정성스럽게 심은 나무를 저렇게 죽게 하는 법이 어디 있노. 우리 어머니가 만일 영혼이 계실 것 같으면 그놈의 도야지를 당장이라도 때려 죽였을 것인데…….”
하고 쉬임 없이 자꾸자꾸 울고 돌아왔었습니다. 진소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의 효성이 하도 지극하니까 무엇이 시켜서 그리 되었는지 그날 밤에 호랑이가 그 도야지를 물어 죽여다가 산소 앞에다 두고 가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그의 효성에 감동이 되야 호랑이까지도 그렇게 하였다고 이상하게 여기고 나라에서는 또 그 소문을 듣고 효성을 가상히 생각하야 효자정문까지 해 세워주었습니다. 그는 고려 말년에 과거를 보아 장원급제를 하고 이씨 왕조에 와서 대사헌(지금 재판장 같은 벼슬) 벼슬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태종 대왕의 둘째 따님 경정공주의 남편 조대림이란 사람은 자기의 세력만 믿고 나라의 법령을 무시하며 갖은 행악을 다하야 세상에서 소위 악망위(惡亡尉)라고까지 별명을 지었었는데 아무리 나쁜 짓을 하야도 누가 감히 말 한 마디를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맹사성은 조금도 용서할 생각을 두지 않고 벼르고 벼르든 차에 한번은 또 조씨가 국법을 범하게 되니 그는 지평 박안신(지평은 지금 판사와 같은 벼슬)과 같이 조씨를 잡아다가 옥에다 가두고 나라에 알리지도 않고 고문을 하며 죄상을 조사하였더니 태종대왕이 크게 노하야 그들을 사형으로 몰아 육시를 하게 하였습니다. (육시는 시가에서 여러 사람 보는 중에 죽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영의정으로 있는 성석린(영의정은 지금의 총리대신과 같습니다)이 극히 간한 까닭에 다행히 죽지 않고 벼슬을 하다가 세종대왕 정미년에 우의정이 되고 또 얼마 안 있어서 승차가 되어 좌의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천성이 결백하고 청렴하야 비록 일국의 정승 지위에 있어도 그 집의 살림살이가 궁한 선비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집도 오막살이에서 살고 그 중에도 지붕을 못이어서 비가 올 때면 우산을 받고 비를 피하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병조판서(지금 육군대신)가 무슨 일을 품하러 그의 집에 갔었는데 마침 비가 와서 빗물이 떨어지매 관복을 다 적시고 집에 돌아와서 탄식하며 말하되 정승의 집이 그러한 터에 내가 큰집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죄송스러운 일이라 하고 자기 집 행랑을 모두 헐어버렸습니다. 그는 서울에 살며(지금 서울 가희동의 맹현) 온양 시골집으로 근친을 하러 다니는데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인을 많이 데리고 다니거나 또는 지방 관서에 들려 자지 않고 항상 소를 타고 다니며 주막집에서 아무렇게나 자고 지냈습니다.
한번은 양성과 진위의 두 군수가 그의 시골 간다는 말을 듣고 영접하러 장호원까지 와서 등대하고 있었는데 그가 소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보통의 농군으로 알고 하인을 보내어 호령하되 지금 정승 행차가 오실 터이니 속히 소에 내려서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인은 멋도 모르고 그를 쫓아가서 소리를 크게 지르며 빨리 내리라고 야단을 하니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대답하기를 나는 온양 사는 맹고불이니 사또께 말씀하라 하였습니다. 하인이 돌아가서 그대로 말을 하니 두 군수는 깜짝 놀라서 허둥거리며 뛰어나오다가 인장(印)을 떨구어서 그 인장이 연못으로 굴러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야 그 연못의 이름을 지금까지 인침연(印沈淵)이라 한답니다.
그는 중도에서 비를 만나 용인여관으로 들어가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 여관에는 어떤 사람이 수다한 인마를 데리고 와서 먼저 위층 좋은 방을 차지하고 있음으로 그는 뜰아랫방 한 구석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원래 경상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벼슬을 하여 보려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이었습니다. 비는 오고 심심하니까 맹정승을 자기 방으로 오라고 하야 서로 장기도 두며 여러 가지 실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최후에 서로 약조하기를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의 끝에는 반듯이 공(公)과 당(堂)을 붙이어서 말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야 맹사성은 먼저 묻기를
“당신은 어찌하야 서울로 가는 공.”
하였더니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벼슬 취재를 보려고 간 당.”
하였습니다. 맹사성은 웃으며 또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위하야 주선해 주면 어떨 공.”
하였더니 그 사람은
“될수입 당.”
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맹사성이 능히 그럴 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뒤 며칠 안 되어 맹정승이 서울 와서 상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취재를 뵈러 들어왔습니다. 맹 정승은 그 사람을 보고 웃으며
“요새에 어떤 공.”
하니 그 사람은 땅에 엎디며
“죽여지 당.”(죽여서 마땅하는 말)이라 하니 만좌가 모두 어쩐 영문인지 모르고 경황하였다가 맹 정승이 전날 용인에서 두 사람이 통하든 이야기를 하니 여러 재상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하고 그때 그 사람은 또 맹 정승의 추천으로 지방 군수를 하야 여러 고을을 지내는데 또한 군수노릇을 잘 하니 세상 사람들이 공당군수라고 하야 한때의 이야기 거리가 되었었다고 합니다.
맹 정승은 이와 같이 혼후하고 청렴하면서도 일을 처리하는 데는 퍽 정중하고 대체를 주장함으로 누가 감히 경홀하게 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음률을 매우 좋아하여 공사 여가에는 항상 집에 와서 문을 걸어 잠그고 저(笛)를 3-4곡조씩 불고 손님을 거절하다가 공사로 품하는 일이 있으면 문을 열고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일생을 지내다가 72세에 돌아가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태평재상이라 칭송하고 돌아갈 때에 세종대왕께서 친히 임상까지 하시고 시효를 문정이라 내리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