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리, 역사동화 혹은 창작옛이야기에서 살펴보기


《불가사리》
(강숙인 글/푸른책들/2010년)
《불가사리를 기억해》(유영소 글/홍선주 그림/사계절/2009년) 

 

1.

2010년 4월 창비 세미나를 들으며 머리가 참 복잡해졌다. 김환희 선생님이 발표하신 내용 가운데 ‘창작옛이야기’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물론 ‘창작옛이야기’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건 아니다. ‘창작옛이야기’라는 말을 들은 건 몇 년 전이었다. 한 학부모님이 옛이야기랑 창작옛이야기는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 오셨다. 그땐 정말 단호하게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옛이야기면 옛이야기지 창작옛이야기라는 말은 없다고. 옛이야기라는 것은 구전문학인데 어떻게 창작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냐고. 하지만 이때 학부모님이 말씀하신 창작옛이야기와 김환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창작옛이야기라는 게 같은 의미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다 창작옛이야기에 대해 또 한 번 고민을 하게 되는 일이 생겼다. 지난 해 말 김환희 선생님이 새로 쓰신 《옛이야기와 어린이 책》(창비)과 관련해 강의를 하실 때였다.  

“저는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모두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터널》(논장)에 대한 이야기 도중 김환희 선생님이 문득 이런 말씀을 하셨다.
창비 세미나를 찾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옛이야기와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창작동화에 대한 관심이 물론 컸지만 김환희 선생님이 갖고 계신 생각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이날 창비 세미나에서 김환희 선생님은 발제문을 통해 ‘창작옛이야기’를 ‘옛이야기’의 하위 장르로 간주하고, ‘작가가 옛 서사문학에서 모티프를 끌어오고 개인적인 상상력을 동원해서 창작한 옛이야기로서, 일상현실과는 다른 옛날이라는 시공간에서 사건을 펼쳐 보여주는 이야기’로 규정을 내리셨다. 덕분에 선생님이《터널》을 설명하며 옛이야기라 이야기한 까닭은 이해가 됐다. 이 책은 ‘옛날옛날’로 시작하고 이야기 중간중간에 여러 종류의 옛이야기 모티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였다.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이해가 된 건 일부분일 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더욱 커졌다. 질의응답 시간에 개념에 대한 질문지를 제출했지만 아쉽게도 개념에 대한 논의는 그 자리에서 논의하지 않기로 합의가 되었던 것 같았다. 질문지는 여럿 나온 듯 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덕분에 창작옛이야기란 개념은 지금도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어떻게 풀어야 할 지 막막하긴 하지만 조금씩 문제에 접근해 보고 싶었다.
그러다 생각이 난 책이 바로 《불가사리》(푸른책들)과 《불가사리를 기억해》(사계절)이다. 두 책 모두 불가사리에 관한 이야기지만 김환희 선생님은 《불가사리》는 ‘역사장편동화’로, 《불가사리를 기억해》는 ‘창작옛이야기’로 분류했다. 《불가사리》의 경우 작가 자신이 고려 말에 일어난 사건을 다룬 ‘역사장편동화’로 간주했기 때문에 창작옛이야기라는 갈래에 넣기 힘들다는 것이 이유였다.
얼핏 생각하면 두 작품 모두 ‘창작옛이야기’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분명할 것 같은데,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다시 한 번 들었다. 그리고 똑같이 불가사리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면서 하나는 역사동화로 또 하나는 창작옛이야기로 분류될 수 있었던 건 어떤 차이 때문이었을까 궁금해졌다.

2.

두 작품은 모두 불가사리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사뭇 다르다. 두 이야기가 어떻게 다른지 먼저 간단히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불가사리》는 장이와 연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라 할 수 있다. 고려 말 ‘소’ 지역에 살던 장이네 가족은 소에서 도망쳐 나온다. 당시 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신분은 양민이었지만 나라에 먹, 자기, 종이 등의 공물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노비만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차라리 개경의 부잣집 노비로 사는 게 낫다며 소에서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장이 가족도 그랬다. 하지만 아버지는 추쇄꾼에게 잡혀가고 어머니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길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길에 홀로 남은 장이를 대장장이인 부쇠가 발견해 집으로 데리고 온다.
장이와 부쇠의 딸 연두는 이렇게 만난다. 둘은 오누이처럼 지내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다. 하지만 장이는 부쇠와 함께 역모라는 모함을 받아 잡혀 들어가 죽고 만다. 무기를 만들라는 지역 세도가의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불가사리는 연두와 죽은 장이를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불가사리 본연의 의미가 사라진 건 아니다. 불가사리는 성격이 아주 분명하다.
혼자 남은 일곱 살 장이의 손에는 아버지가 나무로 깎아 만들어준 불가사리가 쥐어 있었다. 아버지는 백성들이 못 살만큼 세상이 많이 어지러울 때면 불가사리가 백성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나타난다고 하셨다. 불가사리가 쇠를 먹는 건 쇠가 엽전과 무기를 만드는 나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렇다고 불가사리가 처음부터 쇠를 먹는 건 아니며 새끼 때는 사람이 주는 밥도 잘 먹지만 몸집이 커지고 쇠맛을 알게 되면 본격적으로 쇠를 먹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엿하게 자라난 장이는 연두를 위해서 불가사리를 만든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것보다 더 크게. 하지만 불가사리가 거의 완성될 무렵 장이는 죽음을 맞았고, 이 불가사리는 연두에게 발견된 뒤 생명을 얻는다.
연두는 사람들 몰래 밥을 먹이며 불가사리를 키우지만 왜구의 침입으로 수도인 개경까지 위태로워지자 검배의 설득으로 불가사리를 전쟁터에 내보낸다. 불가사리 덕분에 왜구는 물리쳤지만 지배 세력에게 불가사리는 반갑지만은 않은 존재다. 결국 검배를 시켜 불가사리를 죽이게 한다. 하지만 불가사리를 죽이려던 칼에 연두와 불가사리 모두 죽고 만다. 그리고 죽은 연두 옆에 장이가 나무로 깎아 만들었던 불가사리가 놓여있다.
이처럼 이 책은 불가사리 이야기가 바탕에 두껍게 깔려 있긴 하지만 불가사리 이야기는 아니다. 불가사리는 장이와 연두의 사랑을 이어주는 중심 매개일 뿐이다.

반면 <불가사리를 부탁해>에서 불가사리는 다르다. 《불가사리를 부탁해》에 수록된 단편 가운데 한편이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 불가사리는 분명히 주인공 위치에 서 있다. 불가사리의 탄생에서부터 사라지기까지의 과정이 이야기의 주된 서사라는 점에서 그렇다.
아기를 너무나 갖고 싶어 했던 아줌마가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가 전쟁터에 끌려갔으니 아기를 갖게 될 희망도 없다. 그 아줌마가 하루는 밥을 먹다 손가락에 밥풀들이 붙자 심심풀이로 밥풀을 두덕두덕 뭉쳐서 무언가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불가사리다.
불가사리는 만들자마자 척척 걸어 다니며 배가 고프다며 쇠붙이를 달라고 한다. 불가사리가 아줌마 집에 있는 쇠붙이를 다 먹고 점점 커지자, 아줌마는 불가사리에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의 무기를 먹어 치우라고 알려준다. 전쟁터는 무기가 사라지게 됐고, 덕분에 전쟁은 끝났다. 아저씨도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아줌마랑 알콩달콩 살며 예쁜 아기도 낳았다.
하지만 원하던 아기를 얻은 아줌마는 불가사리를 잊었다. 그 사이 불가사리는 불가사리를 앞세워 이웃나라를 쳐부수려는 임금님한테 잡혀 동굴 감옥에서 지내고 있었다. 불가사리는 아줌마를 기다렸다. 아니, 아줌마가 아니라도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줌마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불가사리를 잊었기 때문이다. 불가사리를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은 불가사리를 이용해 전쟁을 벌여서 떼돈을 벌려는 사람들뿐이었다.
마침내 동굴 감옥이 무너졌고, 불가사리는 탈출한다. 불가사리는 사람을 잡아먹으라고 부추기던 임금을 꿀꺽 삼키고 만다. 그리고 그 소문이 퍼지면서 불가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이 된다. 무엇보다 쇠붙이로 만들어진 엽전을 빼앗길까 다들 전전긍긍한다. 아줌마도 마찬가지다. 불가사리가 자신을 원망하며 찾아올까 더욱 노심초사다.
드디어 불가사리와 아줌마가 만난다. 하지만 불가사리가 본 건 자신을 반기는 아줌마가 아니었다. 아줌마는 자신을 두려워하며 떨 뿐이었다. 불가사리는 아줌마가 참말로 보고 싶었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뒤늦게 아줌마가 불가사리에게 용서해 달라며 찾아다녔지만 소용이 없다. 이후 불가사리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소원을 이루고 난 뒤, 불가사리를 잊고 마는 아줌마의 모습은 우리가 불가사리의 의미를 왜 잊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듯 하다.
이처럼 이 두 작품은 똑같이 불가사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불가사리》는 불가사리를 작품 전체의 배경으로 삼아 장이와 연두의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고, <불가사리를 부탁해>는 불가사리의 탄생부터 불가사리가 사라지게 되는 과정을 통해 불가사리의 존재를 독자들에게 또렷이 각인시켜 주고 있다.

3.

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 역시 차이가 있다. 《불가사리》는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던 고려 말 우왕 시절의 개경 인근의 고을을 시공간으로 하고 있다. 반면 <불가사리를 부탁해>는 보통의 옛이야기처럼 ‘옛날 어느 마을에’로 시작한다.
물론 구체적인 시공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두 작품의 장르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전설의 경우 구체적인 시공간이 있지만 옛이야기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서술 방식이 옛이야기의 어법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시공간이 옛이야기의 어법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서술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구체적인 시공간을 갖고 있는 《불가사리》는 당시 시대 분위기는 물론이거니와 등장인물들의 모습 또한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밥풀로 만들어진 불가사리 대신 나무를 깎아 만든다거나 쇠맛을 알기 전까지는 사람들과 똑같이 밥을 먹는다는 설정, 쇠를 먹는 불가사리를 등장시키면서 주된 공간을 대장간으로 잡아 쇠가 갖고 있는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는 것도 소설의 어법을 구사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설정이 있었기에 비록 장이와 연두의 사랑이 비극으로 막을 내리긴 했지만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남을 수 있었다.
반면 <불가사리를 부탁해>는 불가사리가 탄생하고 사라지는 과정의 서사에만 집중한다. 불가사리를 만든 아줌마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고 어느 시대이고 하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불가사리가 왜 탄생했고, 왜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만 집중하게 한다. 즉 《불가사리》가 소설의 어법이라면 <불가사리를 부탁해>는 옛이야기의 어법이다.
마지막에서 작가는 불가사리를 만들었던 아줌마의 아들이 기와장이가 되어 기와에 불가사리를 그려 넣고 구웠고, 지금도 경복궁 아미산 굴뚝에서 그 불가사리를 확인할 수 있다며 불가사리를 현재 우리의 공간으로 불러낸다. 마치 옛이야기에서 ‘그래서 잘 살았대. 아마 지금도 어디에서 살고 있을 걸’하며 끝나듯이 말이다.

4.

두 작품을 견줘서 읽어보니 같은 불가사리 이야기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김환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창작옛이야기라는 개념만 대입해 생각한다면 두 작품 모두 창작옛이야기에 포함되겠지만, 작가의 말을 빌어서나마 《불가사리》를 창작옛이야기에서 제외하고 역사동화로 분류한 건 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이처럼 예외가 생길 여지가 있다면 창작옛이야기라는 개념은 좀 더 세심하게 다듬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더불어 창작옛이야기가 옛이야기의 하위 장르라는 규정 역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옛이야기의 가장 기본은 뭐니 뭐니 해도 글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만들어진 구비문학이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에서 분기별로 펴내는 《어린이문학》 2010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