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리고 또 하나의 나

《수일이와 수일이》(김우경 글/권사우 그림/우리교육/2001년)

 

1.
어린 시절 들었던 몇 안 되는 옛날이야기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손톱을 먹고 자란 쥐가 사람이 되어 진짜를 몰아내는 이야기였다. 특별히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에서 들었던 기억은 없다. 어쩌다 밤에 손톱을 깎을 때면 어김없이 듣게 되는 이야기였다.
어려서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웬지 오싹해지는 바람에 한동안은 반드시 환한 낮에만 손톱을 깎곤 했다. 하지만 조금 머리가 크고 난 뒤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미신을 누가 믿어?’ 하며 오히려 보란 듯이 밤에 손톱을 깎았고, 그 때마다 이 이야기를 듣곤 했다.
커가면서 이야기는 거의 잊어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제대로 된 옛날이야기로 들은 게 아니라 손톱을 깎을 때마다 적당한 부분의 이야기를 듣곤 했기 때문에 자세히 기억을 못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아주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바로 손톱을 먹은 쥐가 그 사람으로 변하고, 주위 사람들이 모두 다 가짜를 진짜라고 하고, 진짜가 가짜에게 떠밀려 집을 나가는 장면이다.

2.
내 몸이 둘이라면…….
이런 생각 한두 번쯤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원이지만, 내 몸이 둘이라면 하기 싫은 것, 힘든 것은 또 다른 나에게 시키고 나는 진짜 하고 싶은 일만 실컷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수일이와 수일이》도 그렇다.

“으으, 진짜 내가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하나는 학원에 가고 하나는 마음껏 놀 수가 있지.”

사건은 이렇게 시작한다.
수일이는 컴퓨터 게임을 마치고 컴퓨터를 끄는 순간이 못내 아쉽다. 게임 속에서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컴퓨터를 끄는 순간 수일이 앞에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 현실은 방학 내내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학원에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방학이 6일 밖에 안 남았다는 사실이다.

“정말 네가 둘이었으면 좋겠니?”

이때 누군가 옆에서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황당한 건 이렇게 물은 누군가가 수일이네 집 개 덕실이라는 사실이다. 수일이가 엄마한테 덕실이가 말을 한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다. 개가 말한다는 걸 믿을 사람은 없다. 하긴 덕실이 조차 자신이 수일이와 말이 통하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컴퓨터 게임 하면서 너랑 나랑 전자파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가 생각 할뿐이다.
덕실이는 수일이에게 ‘또 하나의 수일이’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옛날이야기처럼 손톱을 깎아서 쥐한테 먹이라고. 그리고 수일이는 결국 덕실이 말대로 손톱을 깎아서 ‘또 하나의 수일이’를 만들어낸다.
덕실이는 이 책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갑자기 수일이와 말이 통하게 되고, 수일이에게  또 하나의 수일이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이후 수일이의 가장 든든한 의논 상대가 된다. 그처럼 중요한 인물이 왜 개 덕실이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수일이에게 자신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덕실이가 수일이와 유일하게 정을 나눌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3.
수일와 덕실이는 옛날이야기를 현실에서 실현하려 한다. 손톱을 깎아서 속셈학원 가는 길에 있는, 짓다 만 집에 갖다 놓고 온다. 그리고 다음 날 그곳엔 수일이와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수일이가 있었다. 수일이는 쥐한테 손톱을 먹여서 만든 가짜 수일이에게 학원을 가게 하고, 자기는 놀고 싶은 만큼 놀 수 있다. 이제 수일이의 소망은 해결된 것이다.
문제는 상황이 옛날이야기처럼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옛날이야기에서 가짜가 나타나면주위 사람들은 모두 다 가짜를 진짜라고 하고, 진짜는 가짜에게 떠밀려 집을 나가게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사람이 되기 싫다며 투덜대던 가짜 수일이가 점점 진짜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진짜 수일이를 가짜 취급을 한다. 진짜 수일이와 가짜 수일이가 같이 있는 장면을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봐 겁을 먹고 숨는 쪽은 진짜 수일이다. 혹시 누군가 본다면 진짜를 가짜라 하고, 가짜를 진짜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물론 옛날이야기와 다른 부분도 있다.
옛날이야기 속에서 가짜는 대개 그 집안에서 살던 쥐였기 때문에 진짜에 대한 것은 물론 집안 살림살이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어서 진짜 모습으로 변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주인 행세를 한다. 물론 진짜 입장에서 가짜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 또한 전혀 없었다. 그래서 갑자기 나타난 가짜가 자신을 몰아내는 것이 억울하기만 하다.
수일이는 자신이 할 일을 가짜에게 시키고자 일부러 가짜를 만든다. 집안에는 쥐가 없어서 집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가서 가짜를 만들어낸다. 당연히 가짜는 갑자기 자기가 왜 쥐에서 사람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두렵기만 하다. 진짜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처음에는 진짜가 시키는대로 착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짜는 진짜의 생활에 익숙해진다. 잠시나마 수일이가 가짜를 만든 것에 대해 만족할 수 있었던 건 이 덕분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짜 수일이는 진짜 수일이 행세를 하면서 진짜 수일이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반면 진짜 수일이는 진짜 수일이가 할 일도 못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면서 진짜의 모습은 점점 퇴색해가고 만다. 가짜는 진짜처럼, 진짜는 가짜처럼 변해가는 것이다.
마침내 진짜 수일이는 가짜 수일이를 몰아내고 진짜 수일이의 모습을 되찾으려고 한다. 가짜 수일이를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까? 옛날이야기에서 가짜는 고양이로 퇴치한다. 쥐는 고양이한테 꼼짝을 못하기 때문이다.
수일이도 고양이를 이용하기로 한다. 옛날이야기처럼 해서 가짜를 만들어냈으니 해결 방법도 같으리라 생각하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일부러 가짜 수일이를 꾀어서 친구 태호네 고양이를 만나게 했지만 가짜 수일이는 고양이가 귀엽다고만 한다. 가짜 수일이는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옛날이야기 대로 했는데, 왜 가짜를 없앨 때는 옛날이야기 대로 해도 안 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가짜 수일이를 몰아낼 수 있을까? 방학도 다 지나 개학을 하고도 학교에 못 가고 가짜처럼 숨어 사는 수일이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4.
2001년, 이 책이 처음 나오자마자 바로 읽었다. 그 뒤로도 가끔 이 책을 펼쳐 들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수일이가 가짜를 만들었다가 곤란해진 상황은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어렸을 때 들었던 옛날이야기처럼 이 책 역시 쥐가 사람이 되어 진짜 행세를 하는 장면이 너무 강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인 것 같았다.
2009년, 다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김우경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였다. 왜 결말 부분이 생각나지 않는지 결말에 더 신경을 쓰면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왜 가짜 수일이가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건 가짜 수일이가 만났던 고양이가 ‘길들여진’ 고양이였기 때문이었다. 길들여진다는 건 스스로의 삶을 주인으로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수일이가 가짜를 몰아내고 진짜 수일이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진짜 모습을 찾아야 한다.
이제야 이 책의 시작이 왜 컴퓨터 게임을 끝내고 컴퓨터를 끄는 장면에서 시작했는지가 이해된다. 수일이는 현실에서는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컴퓨터 게임 속에서만 주인으로 살았다. 가짜를 만들 생각을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은 수일이가 덕실이와 고양이 방울이와 함께 집으로 가는 장면에서 끝난다. 방울이는 처음엔 길들여진 고양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 스스로 들고양이가 된 고양이다. 옛날이야기처럼 진짜가 가짜를 몰아내고 제자리를 찾는 장면은 없다. 아마 내가 결말 부분이 기억이 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록 마지막 장면이 선명하게 다가오진 못하지만 대신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서 길들여진 삶을 사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는 김우경 선생님 작품의 주된 주제다. 이 책을 덮으며 김우경 선생님의 또 다른 작품 《머피와 두칠이》(지식산업사)가 생각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이 글은 한국어린이문학협회회에서 분기별로 펴내는 《어린이문학》 2009년 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