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 만점 푸른아파트가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요란요란 푸른아파트》
(김려령 글/신민재 그림/문학과지성사/2008년)

 


40년도 넘은 아파트가 있습니다. 푸른아파트입니다. 처음 푸른아파트가 지어졌을 땐 그 동네에서 가장 높고 멋진 아파트였어요.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며 푸른아파트는 하늘을 받친 것 같은 높은 빌딩과 새 아파트 속에 우중충한 늪지대처럼 남았지요. 게다가 재개발이 취소되면서 푸른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강력한 항의 표시로 1동에는 ‘이제 와서 재건축 반대 웬 말이냐!’ ‘우리도 깨끗한 집에서 살고 싶다’라고 쓴 현수막을 걸었고, 3동에는 기다란 검정 띠를 ‘ㅅ’자 모양으로 둘러놓았어요. 그러니 그 몰골이 꽤나 스산해 보일 듯 해요.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이 바로 이 푸른아파트입니다. 아파트가 주인공이라니? 다소 황당한 듯도 해요. 이렇게 아파트(혹은 집)가 주인공인 작품은 본 적이 없습니다. 재개발 혹은 재건축을 소재로 다룬 작품에서 주인공은 당연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지 아파트 혹은 집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엄격하게 말하자면 푸른아파트가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곤란한 점도 있어요. 푸른아파트의 수다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푸른 아파트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핵심이라는 건 분명해요.
푸른아파트는 1동에서 4동까지 네 동의 아파트와 상가가 있어요. 아파트가 다 똑같다고만 생각해 왔는데, 가만 보니 푸른 아파트는 동마다 개성이 넘쳐흘러요.
1동은 정신이 약간 이상해요. 지어진 지 십 년이 흐른 어느 날 벼락을 맞았거든요. 1동은 뒤쪽 벽에 금이 쩍! 가면서도 버티다 정신을 잃었어요. 있는 힘을 다해 사람들을 지켜내려고 했던 거지요. 횡설수설 이상한 말을 하지만 그 말 속엔 여전히 사람을 지켜내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2동은 데리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정이 깊어요. 다른 동처럼 특별한 시련을 겪지 않아서인지 가장 온전하다고 할 수도 있어요. 푸른 아파트의 수다에 나오는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인 ‘기동’이가 사는 곳도 바로 2동 102호랍니다.
3동은 죽은 사람의 영정 사진에 해 놓는 ‘ㅅ’자 모양의 검정 띠 때문에 우중충해 보여요. 게다가 기동이가 ‘이 아파트를 보는 사람은 다 죽는다’라고 낙서를 해 놓는 바람에 기운이 쪽 빠져버린 상태지요. 기동이가 좋아하는 교장선생님 손녀 단아가 살고 있습니다.
4동은 가장 구석지고 그늘지고 습한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잘 띠지도 않아요.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으면 밤마다 몸을 비틀죠. 덕분에 4동엔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이사를 가곤 했어요. 이런 환경 속에서도 오랫동안 살다보니 404호 만화가 선생님이 바로 귀신이라는 소문도 돌기도 했죠.
상가는 가게들이 모여 있다 보니 계산이 빠르지요.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별별 소식을 다 알고 있기도 해요. 하지만 외로움을 탑니다. 밤이면 모든 사람들이 나가니까요.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푸른아파트들끼리만 편을 드는 것 같아 야속해 하기도 하지요.
참 신선합니다. 아파트가 이렇게 개성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우선 그렇습니다. 그리고 푸른아파트의 수다를 통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그렇죠. 또 푸른아파트의 요란한 수다를 듣고 있다 보면 집이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도 해요.
그럼 푸른아파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죠.
푸른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푸른 아파트의 눈에 띠어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주인공은 기동입니다.
이렇게 된 건 기동이가 처음 이곳에 오게 된 사정이나 이후 행동이 튀었기 때문일 겁니다.
기동이는 어느 날 갑자기 2동 102호 할머니에게 떠맡겨진 아이지요. 할머니 집을 팔아 그 돈을 챙기려던 기동이 아버지는 사정이 여의치 않자 기동이만 맡기곤 사라져버렸어요. 고물을 모아서 살아가는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떠맡게 된 거나, 엄마 아빠랑 떨어져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된 기동이나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게다가 기동이는 엄마가 학교를 제때에 보내지 못해서 3학년이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이 많아요.
그 사정이야 어찌됐든 기동이 행동은 푸른아파트의 눈에 거슬렸죠. ‘ㅅ’자 모양의 검정 띠를 두른 3동에 빨간색 분필로 ‘이 아파트를 보는 사람은 다 죽는다!’고 써놓기도 하고, 4동에 가서는 우편함에 있는 편지를 모두 꺼내 주소와 다르게 마구 꽂아두기도 했어요. 또 4동은 ‘안 보이니까 없는 동’이라며 벽에 분필로 ‘0’이라고 커다랗게 써서 색칠을 해 두기도 했어요. ‘우리도 깨끗한 집에서 살고 싶다’는 현수막에 걸려 있는 1동에 가서는 ‘그럼 청소를 하시오’라고 써두기도 했지요. 기동이를 데리고 사는 2동은 안절부절할 수밖에요.
기동이는 조금은 좌충우돌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은 아이예요. 한 번 끝난 일은 뒤끝도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열심히 하는 아이이기도 해요. 고양이를 따라다니는 모습이 고양이를 괴롭히는 것 같지만 실은 새끼를 밴 고양이에게 뭔가를 해주기 위해서였죠. 전학 간 첫 날부터 자신에게 시비를 걸기도 하고, 돈을 빼앗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주한이에게도 나쁜 감정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아요. 오히려 이런 일을 계기로 단짝 친구가 되지요. 4동 404호 아저씨가 만화가라는 말을 듣고는 귀신이 있다는 4동에도 용기를 내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결국 만화가 아저씨를 만나지요.이렇게 기동이의 여러 모습을 알 수 있는 건 기동이를 한 사람의 눈으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1동에서 4동, 그리고 상가가 저마다의 눈으로 기동이를 보고 있죠. 아마도 요란요란 푸른아파트가 아니었다면 기동이는 이처럼 개성 넘치는 인물로 그려지긴 어려웠을 지도 몰라요.
기동이의 진면목은 만화가 아저씨와 만나면서 발휘되죠. 기동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 아저씨를 만나러 와서도 아주 당당한 모습을 보여요.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가와 만화 이야기를 하며 괴담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 아저씨를 무시하기도 해요. 만화가 아저씨가 실은 자신이 좋아하던 그 만화가라는 걸 모르고 말이에요.
기동이와 만화가 아저씨. 두 사람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죠. 만화가 아저씨는 기동이 덕분에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아요. 기동이는 아저씨 도움으로 그림 연습을 할 수 있게 되고요.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그런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상대가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가만 보면 기동이와 만화가 아저씨만 그런 게 아니에요. 푸른아파트 덕분에 더욱 돋보였던 미래아파트는 비상벨도 없고 소화전도 고장 난 푸른아파트에서 불이 나자 대신 비상벨을 울려서 위기를 넘기게 해 줘요. 모습만 돋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돋보이는 행동을 한 거죠.
하지만 여기서 가장 의미 있는 건 아무래도 집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가 아닐까 싶어요. 재건축이다 재개발이다 해서 집이 본래의 가치와는 달리 투자의 대상처럼 여겨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 책은 집의 본래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거든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을 사람이 아닌 푸른 아파트로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일 거예요.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아파트는 결국 우리 삶의 터전이니까요.
1동이 번개를 맞고서도 늘 자신이 집이라는 것을, 집은 사람들을 잘 지켜줘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 잊지 말아야 할 집의 본래 가치에 대한 깨우침을 줘요.

“집도 죽은 집이 있고, 살아 있는 집이 있어야. 요 아파트는 살아 있는 집이여. 한 번도 사람이 빈 적이 없었다니께. 집은 사람을 보듬어 주고, 사람은 집을 보듬어 주면서 같이 사는 거여.”(65쪽)

기동이 할머니는 아파트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처럼 대해요. 재건축 허가가 나고 철거 날짜에 맞춰 이사를 가시면서도 말씀을 하시죠.

“세상에 나는 것들은 다 지 헐 몫을 가지고 나는 것이여. 허투루 나는 게 한나 없다니께. 고 단단하던 것들이 이렇게 제 몸 다 낡도록 사람들 지켜 주느라 얼마나 고생혔냐. 인자 지 헐 일 다 허고, 저 세상 간다 생각허니, 짠 허다.”(168쪽)

이제 요란요란 푸른아파트는 사라지고 새로운 아파트가 그 자리에 들어서겠지요. 그리고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아가며 요란요란한 이야기를 만들어 가겠지요.
푸른아파트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 늘 관심을 갖고 지켜봤듯이 저도 주위 사람들에게 좀더 애정을 갖고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집이 저를 편안하게 쉬게 해 준 것처럼 저도 집이 좀더 편안할 수 있도록 보살펴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사는 이 아파트에서도 푸른아파트처럼 요란요란한 수다가 이어지고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 이 글은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에서 분기별로 펴내는 《어린이문학》 2009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